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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 대선과 스팀펑크

by Domoleft 2024. 12. 2.

미국 대선과 스팀펑크

미국 대선 결과와 민주당의 패배, 트럼피즘의 승리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분석과 비평이 쏟아져 나오고, 각국의 사회운동세력 및 진보좌파들 역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시각을 공유하고자, 한국 진보정당의 당원이며 현재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는 필자가 <도모>에 글을 보내 왔다.


해리스와 트럼프. 출처: www.npr.org

 

선거 결과, 특히 타국의 선거 결과만큼 논평하기 좋은 주제가 없다. 하물며 대상이 초강대국 미국의 선거라면, 언론부터 SNS까지 수많은 이야기들로 뒤덮이기 마련이다. 이번 선거의 핵심 의제는 무엇이었고, 당선과 낙선의 원인은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정치 구도와 지형이 결과를 통해 발현되었는지 어지럽도록 논평이 쏟아진다. 허나 이 노이즈들이 과연 얼마나 영양가가 있는가, 숨을 고르고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때그때 목사가 필요로 하는 교리 해석을 내놓는 성경 스터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미리 정해 놓은 서사" 속에 선거 결과를 욱여넣는 논평들은 삼갈 필요가 있다. 타국의 선거에서 유의미한 내용을 읽어내 우리의 상황에 적용해보고자 애쓰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 모든 뒤틀림과 흐릿함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한다. 화산처럼 터져 나온 욕망과 모순, 생존의 위기에서 우러나온 절박함과 스포츠를 즐기는 카타르시스 사이의 무언가를 2D 화면 속에 지도와 숫자의 형태로 압축시켜 놓은 것, 그것이 우리가 접하는 선거 결과의 형질일 것이다. 그렇다면 답을 정해 놓고 들여다보기 이전에 이 모든 목소리들에 대해 찬찬히 귀를 기울이는 태도. 이 비-도그마적 귀기울임이 진보좌파가 반드시 갖춰야 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때때로 갖추지 못하는 성실함이라고 믿는다.

 

선거의 메카니즘은 한두 줄로 요약될 수 없다. 승패의 요인으로 관점을 좁히더라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미국처럼 파편화된 사회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인종, 교육 수준, 성장한 문화, 이념 등의 기준에 따라 물리적 공간이 분리된 사회, 그리하여 게토화된 오피니언 버블의 집합체로써 작동하는 사회가 미국이다. 사회 전체를 아우름과 동시에 개별 집단의 독특한 기제에 집중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 "도널드 트럼프가 카말라 해리스를 상대로 경합주와 총 투표수에서 접전승을 거둔"[각주:1]  2024년 미국 대선 결과에 대한 필자의 해석을 내놓으려 한다.


통시적 해석

2020년 대선 대비 투표 경향성 이동 지도. 출처: 뉴욕타임스

 

뉴욕타임스의 선거 그래픽 중, 2020년에 비하여 각 지역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이미지화한 지도를 첨부한다. 좌측으로 향하는 푸른 화살표는 지난 대선 대비 민주당 투표 경향이 강해진 지역, 우측으로 향하는 붉은 화살표는 공화당 투표 경향이 강해진 지역이다. 한눈에 알 수 있다시피 전체적으로 공화당과 트럼프로의 투표 경향이 매우 강해졌고, 특히 크고 붉은 화살표들이 라틴계 및 아시안 인구가 많은 지역들(텍사스 남부, 플로리다의 동남부, 뉴욕시 및 뉴저지 중북부 등)에 위치해 있다. 트럼프의 등장 이후 가속화 중에 있던 백인 저학력층의 우경화는 이번 선거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되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켄터키 동부의 '석탄 카운티'들, 내지는 아이오와 동부의 농촌 지역들이 그 지리적 증거를 제시하는 가운데, 미시간 중부 및 오하이오 동부로 상징되는 러스트벨트 역시 트럼프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여기까지는 선거 이전에도 예측 가능했던 부분으로, 선거 후 많은 좌파들이 제시했던 "노동계급 이탈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상기의 그래픽은 이번 선거 결과를 단 하나의 서사 속에 집어넣을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전달하고 있다.

 

테네시와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 등의 남부 주들은 경합주가 아니기에 주목받지 못했으나, 트럼프를 향한 상당한 쏠림이 관측된다. 흔히 이야기하는 "노동계급"의 주 거주지가 아닌 남부의 카운티들도 이러한 흐름을 피하지 못했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역시 매사추세츠이다, 버몬트 등 북동부 지역과 버지니아 북부로 대표되는 고학력 고소득 백인 거주 지역 역시 트럼프를 향해 상당히 움직였다는 지점일 것이다. 특히 전통적 경합 지역이었으나 인종 구성의 다양화, 고학력층의 진보화, 트럼프에 대한 거부감이 맞물려 빠르게 민주당 강세 지역으로 변모하던 버지니아 북부(워싱턴 D.C. 교외)의 움직임은 선거일 밤 트럼프의 당선을 알리는 카나리아의 역할을 도맡았다. 해당 지역에서 해리스는 트럼프를 40%p 이상 앞섰으나, 바이든이 4년 전 벌렸던 50%p 이상의 격차보다 10%p 이상 좁혀진 것이다. 2024년 대선을 트럼피즘의 승리와 노동계급의 우경화라는 관점만으로 접근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출구조사에서 드러난 각종 집단의 움직임도 흔히 이야기되는 내러티브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미국의 출구조사는 큰 가치가 없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데이터 값이 결과에 맞게끔 선거 과정 내내 보정을 거치며, 따라서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기능은 전혀 없을 뿐더러 실제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였는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다만 선거 후 American National Election Studies가 진행하는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데이터이기에, 불확실성을 전제한 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2만 명이라는 적은 표본 수와 큰 오차범위, 전 대선 대비 투표율 차이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지점 등을 지리적 결과와 종합하여 감안해야 한다.

연령 18~29세 30~44세 45~64세 65세 이상
해리스 54% 49% 44% 49%
트럼프 43% 48% 54% 49%
2020년 대비 -13%p -5%p -9%p +5%p

2024년 미국 대선의 세대별 득표율 요약.

인종-젠더 백인 남성 백인 여성 흑인 남성 흑인 여성 라틴계 남성 라틴계 여성 기타
해리스 37% 45% 77% 91% 43% 60% 48%
트럼프 60% 53% 21% 7% 55% 38% 46%
2020년 대비 0%p +3%p -4%p +3%p -35%p -17%p -18%p

2024년 미국 대선의 인종-젠더별 득표율 요약.

 

낙태권 보장 원칙을 폐기했던 돕스 판결에 가장 민감히 반응한 백인 고학력 여성 그룹, 그리고 트럼프 개인에 대한 비토가 강한 고령층 유권자 그룹을 제외하면 세대와 인종을 막론한 트럼프로의 쏠림 현상이 관측된다. 물론 지역과 인종 등의 변수에 따라 그 규모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위스콘신 대학교 정치학부 교수이자 동 대학의 선거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배리 버든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일괄적 편향(Uniform Shift)'라는 개념으로 정의한 바 있다. 2016년, 2020년의 선거와는 달리 한쪽 방향으로의 일괄적 움직임이 관찰되었다는 것이다. 버든 교수는 이에 대하여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불만족감과 진영에 따라 양극화된 여론이 맞물린 끝에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는, 그러나 당선자를 바꾸기에는 충분한 규모의 일괄적 편향이 발생한 듯 하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이 와중 전국 득표율이 6%p가량 움직인 가운데 해리스 캠페인이 돈과 시간을 들인 경합주들에서는 쏠림이 상대적으로 작았다는 점 역시 명기할 필요가 있다. 20년 대비 미시간은 4%p, 펜실베니아는 3%p,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위스콘신은 2%p 가량의 차이가 발생하여, 해당 5개주 모두 1~2%p 차로 트럼프가 승리했다. 해리스 캠페인의 압도적인 자금력과 조직력이(트럼프 캠페인은 자금 부족과 지역 조직의 쇠퇴 탓에 선거운동의 대부분을 일론 머스크 등의 외부 조직에 의존했다) 전국적 역풍에도 불구하고 경합주에서 박빙의 승부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비록 대통령 당선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해리스 캠페인의 선전 덕분에 함께 치러진 상하원 선거에서 공화당 압승이라는 재앙적 결과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 현재 미국 학계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렇다면 해리스 캠페인을 옭아맨 정치적 중력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정치학의 fundamental(사전적으로는 근본, 기본, 기초 등으로 번역된다 - 편집자 주)이라는 개념을 주목해봄직 하다. 이는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결정할 수 없는 선거의 기본적 '설정'을 칭하는 개념으로, 경제적 상황과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 사회 전반에 대한 만족감 등을 포괄한다. 마땅한 번역을 찾지 못하였으나 기본변수 정도가 적절하리라 생각된다. 선거 과정의 이슈와 후보자의 자질 등과 전혀 무관하게 선거 구도와 흐름을 결정하는 이 fundamental은 완전한 양당제인 미국 정치에서 놀라울 만큼 명료하게 작용한다. 낮은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과 나쁜 경제 상황 등이 여당 후보에게 불리하다는 점이야 만국 공통이겠으나, 미국은 제3정당 등의 변수가 전무하기에 상관관계를 더욱 또렷하게 관찰할 수 있다.

 

바이든은 인기가 없는 대통령이었으며, 인플레이션 및 경제 전반에 대한 여론의 문제의식은 상당했다. 트럼프로의 일괄적, 전국적 편향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바이든의 지지율은 40% 남짓으로, 통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여당 후보가 승리하기 대단히 어려운 조건이었음은 분명하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40% 초반대 지지율의 대통령 하에서 여당 후보가 승리한 선거는 없었다. 선거 후 싱크탱크 Navigator의 조사에 따르면 경제 상황에 대한 부정 평가는 70%에 달했으며 2024년 처음 트럼프로 투표한 유권자들의 경우 부정 평가가 무려 87%에 달했다. 물론 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 역시 정파성에 따른 전략적 판단에서 자유롭지 않으나, 개인의 상황에 대해 묻는 조사 역시 비슷한 경향성을 보인다. 즉 경제 상황에 대한 불만에 대통령의 지지율이 직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좌측: 역대 미 대선의 대통령 지지율과 여당 대선후보 득표율 비교. 우측: 미국 경제에 대한 2024년 인식 조사.

 

이런 상황 속에서, 2024년 대선은 온갖 노이즈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단한 기제를 통해 결정된 선거였다는 분석 역시 등장한다. 후보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종의 "정권 심판 선거"였다는 것이다. 다소 출처가 불명확하나 7월에 진행된 바이든 캠페인 내부조사가 트럼프의 압승(뉴저지, 일리노이 등 블루스테이트에서마저 승리하며 400명 이상의 선거인단을 확보)을 예견하는 결과였다는 소문도 선거가 끝나자 흘러나오고 있다. 후보직을 사퇴하지 않았다면 1980년대 이후 최악의 패배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확실한 것은 통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2024년 대선의 결과는 이변이 아니었다는 점일 것이다.

 

다른 숫자들도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들은 Direction of Country(국가의 방향)라는 주제의 여론조사를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국가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매우 광범위한 질문 형식의 조사이다. 근 10년 간 코로나 팬데믹에서 빠져나오던 2021년 초여름을 제외하고서 '옳은 방향'이라는 응답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응답을 웃돈 적이 없으나, 2024년 대선에 근접하여서는 '잘못된 방향'의 응답이 두드러지게 압도적임이 관찰된다. 2012년 오바마의 재선(당시 일시적으로 '잘못된 방향'과 '옳은 방향' 간의 응답 차가 줄어든 상태였다) 이후 치러진 9회의 선거 중 집권당이 승리를 거둔 선거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각주:2] 불만이 팽배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변화의 후보 change candidate"를 찾았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그 기준에 트럼프가, 그것도 두 번이나 부합한 것이다.

  2013
주지사선
2014
중간선거
2016
대선
2017
주지사선
2018
중간선거
2020
대선
2021
주지사선
2022
중간선거
2024
대선
대통령 오바마 오바마 오바마 트럼프 트럼프 트럼프 바이든 바이든 바이든
선거 결과 공화당
선전
공화당
압승
정권교체 민주당
압승
민주당 
낙승
정권교체 공화당
압승
공화당
접전승
정권교체

2013~2024년 미국 주요 선거결과(대선, 중간선거, 주지사 선거) 요약.

2010년대~2020년대 미국 국가 방향성 인식 조사.


불만감의 정체성 정치

그렇다면 이번 선거를 지배한, 그리하여 끝내 결과를 좌우한 fundamental, 혹은 정치적 중력의 정체를 보다 깊이 있게 알아보자. 많은 이들이 fundamental을 경제 상황의 동의어로 오인한다. 경제 상황과 그에 대한 인식은 분명 정치 지형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 거대한 영향력을 지니나, 현실의 복잡한 단면을 담아내는 데에 한계가 있다. 특히나 일부 유권자 그룹의 박탈감과 피해의식이 효율적인 정치적 동력으로 전환되는 트럼피즘이라는 현상(트럼피즘은 이념이 아니라 현상이다. 이는 중요한 차이점이다)은 단순히 경제만으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경제 이상의 요인들이 개입하여 현재의 정치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오바마가 준수한 지지율과 경제 지표로 임기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당선되자, fundamental의 범주를 단순히 경제 지표 및 지지율에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등장했다. 존 사이드, 마이크 테슬러, 린 바베렉은 공저한 논문 <2016년의 선거 지형(The Electoral Landscape of 2016)>에서 당파성의 양극화와 백인 유권자 집단의 인종적 적대감이 2016년 대선의 기저에 존재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특히 이민자와 유색인종을 대하는 백인 유권자의 정치적 태도가 당파성 및 교육 수준 등에 따라 크게 갈라졌고, 이것이 기존의 fundamental을 넘어서는 새로운 요소로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당파성과 인종적 적대감의 문제가 2016년 선거의 일시적 이슈가 아니라, 경제 위기와 오바마 당선 후 2010년 중간선거, 2012년 대선, 2014년 중간선거 전반에 걸쳐 발달되어 온 기제임을 밝혔다. 이러한 주장은 위스콘신 대학의 캐서린 크레이머 교수의 저서 "정치적 분노: 위스콘신 시골의 의식화와 스콧 워커의 부상"[각주:3]과도 일맥상통한다. 크레이머 교수는 경제적 불만, 도심 엘리트들에 대한 반감, 인종적 적대감("우리 동네로 와야 할 자원이 도시의 흑인 공동체에 전부 흘러간다"), 공동체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시골 지역 백인 유권자들의 정서와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결론내린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알리 혹스차일드 교수가 내놓은 신간 <빼앗긴 자부심(Stolen Pride)>도 이러한 맥락에서 유의미한 발견을 담고 있다. 혹스차일드 교수는 직접 옛 탄광지대이자 백인 비율이 95%가 넘으며 대단히 가난한 동부 켄터키의 켄터키 5구를 방문, 주민들과 시간을 보내며 수많은 인터뷰와 대화를 진행했다. 그에 따르면 트럼프의 가장 핵심적이고 열성적인 지지층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소 달리 "몰락한 지역의 상류층"이었다. 자신의 삶은 여전히 안정적인, 그러나 지역 공동체의 몰락으로 인해 자부심에 상처를 입은 중상류층들이 트럼피즘의 심장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레이머 교수와 혹스차일드 교수가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 동일하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경제, 인종, 젠더, 공간적 구분 등이 한데 얽힌 복합적 정체성 정치인 셈이다.

알리 혹스차일드 교수와 저서 <빼앗긴 자부심>. 출처: www.lllcf.org

 

이 정체성 정치는 하나의 정권에 대해 한정되지 않고, 하나의 동기로부터 출발한 것도 아니며, 하나의 사람만으로 표현할 수도 없다. 미국 사회의 수많은 경계선과 갈등이 유권자의 몸과 공동체로 흘러 들어와 선거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소속 집단에 따라 오피니언 버블과 물리적 거주 공간이 거의 완벽하게 분리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양상이다. 이번 선거 트럼프를 향해 크게 쏠린 라틴계 남성, 저학력 아시아계 역시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정체화 과정을 거쳤으리라 짐작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와 조사가 대단히 부족하기에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제각기 체화한 경험, 판단의 원인과 요소가 다르더라도 "현재 상태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감"이 다양한 정체성 정치를 관통하는 바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미국 정치를 논할 때 "기후와 날씨"라는 비유가 종종 사용된다. 정치학자들은 기상청에 앉아 있다. 꽃샘추위가 찾아오는 봄, 마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급성 호우, 기껏 우산을 챙겼더니 눈 앞에 펼쳐진 맑은 하늘. 날씨는 예측하기 어려울 뿐더러 변수도 많다. 각 선거에서 어떤 결과가 구체적으로 나올지 알기 어려우며, 특히나 박빙의 선거일 경우 틀리기 일쑤다. 그러나 동시에 기상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기후를 읽는다. 매일매일의 날씨는 불규칙할지 몰라도 결과값을 모아놓으면 패턴과 흐름이 보이기 마련이다. 현상에 대한 불만이 미국 사회의 대기 중에 떠다니고 있다. 공동체마다 개인마다 원인도 발현 형태도 다르지만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같다.


진보란 스팀펑크적 상상력이다

'진보적 시대'를 상징하는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

 

혹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의 미국과 현재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주장을 편다. 잦은 정권 교체와 양극화된 여론, 박빙의 선거 결과와 더불어 제도 전반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던 시대를 떠올린다. 혼란스러운 시대 뒤에는 "진보적 시대(The Progressive Era)"가 찾아왔다. 노동조합이 꽃피우고 수많은 영역의 사회운동이 동력을 얻었으며 진보적 어젠다를 중심으로 인텔리 사회가 뭉쳤던, 그리하여 사회 전반의 제도와 문화가 거대한 변화를 경험한 시대였다. 좌절과 그럼에도 남은 조금의 희망과 함께, 이제는 21세기의 "진보적 시대"를 열어낼 비전을 준비해야 한다.

 

최근 '더 뉴요커(The New Yorker)'에 "스팀펑크가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Could Steampunk Save Us?)"라는 제목의 사설이 올라왔다. 손목시계부터 비행기 항로 조정 데이터베이스, 미국 은행의 핵심 규칙까지 일상 곳곳의 진보된 기술들이 사실은 백 년도 더 된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어 끊임없는 수리와 리터치가 필요하며, 때에 따라서는 급작스레 작동을 멈추기도 한다는 것이다. 새로움과 낡음은 하나의 순간에서 위태롭게 공존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생각보다 허술하고 위태롭다. 마치 연기를 뿜고 삐그덕대며 덜덜거리는 스팀펑크의 기계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현재의 미국, 미국을 넘어 한국을 비롯한 제1세계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고장난 기계의 비유보다 더욱 적절한 언어는 없으리라. 우리의 문명은 인류와 지구생명체들의 절멸을 향해 질주하는 고장난 기관차,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오작동하는 바퀴, 권위주의와 소수자 혐오의 부상은 꼬여버린 내선일지도 모른다. 특히나 미국의 경우 선거제도와 연방제적 전통, 필리버스터의 영향으로 입법부의 손발이 묶이며 시대에 발맞춘 사회정치적 업데이트가 극도로 어려워진 상황이다. 사법적 영역에서 여러 진보를 이뤄왔으나 최근 연방대법원의 판도가 완전히 보수로 기울며 그 가능성마저도 가로막혔다.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중.

 

트럼피즘은 여기저기 땜질하며 명을 이어오던 미국의 기반 시스템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해, 사회적 불만이 냉각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현상으로써 해석이 가능하다. 거대양당의 적대적 공생 속에서 불평등과 폭력, 차별과 혐오가 곪아터지고 있는 한국의 상황과도 근본적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땜질과 수리가 불가한 때에 이르렀을 때 스팀펑크 세계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한 장면을 떠올린다. 마법의 효력이 다해 하울의 성이 무너지자 소피는 악마 캘시퍼에게 머리카락을 내놓아 잔해로부터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냈다. '부활'의 서사도 아니고 '단절'의 서사도 아닌, '창조적 연결'이자 '계승'의 서사다. 이미 실패한 옛 방식과 패러다임에 매달리지 않으며, 동시에 지나치게 생경하고 오만한 언어 속에 갇히지 않는 스팀펑크적 상상력이 진보정치에 필요하다.

 

그러한 고민 속에서 대선 직후 버니 샌더스가 올린 글을 재해석해 볼 수도 있다. 민주당이 노동계급을 저버렸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샌더스의 진단은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그가 대안으로 내놓은 노동계급 정치 역시 피상적인 수준에 그쳐, 실질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청사진은 여전히 그려지지 않는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가 인사부터 액션까지 21세기 들어 가장 친노조적인 행정부였다는 사실 속에서, 샌더스의 글은 불투명한 현실인식에 기반한 좌파적 불평으로 쉽게 호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샌더스가 해당 글과 평생의 정치 여정에 걸쳐 주장해온 플랫폼 속에는 여전히 2024년의 진보좌파에게 반드시 필요한 부품들이 있다. 트럼피즘에 맞서는 기획에 있어, 특히나 백인 노동계급 뿐만이 아니라 유색인종 노동계급 역시 트럼프로 쏠리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노동계급과 진보좌파의 연결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복구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명확하다. "불만감의 정체성 정치"와 "노동계급 정치"를 연결하여 다양한 노동계급 공동체들의 정체성화를 목표하는 정치 플랫폼은 유의미한 해답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정치의 방식은 기존의 진보주의자들이 택해온 방식, 샌더스의 방식과도 크게 달라져야 한다.

버니 샌더스의 2024년 대선 이후 성명. 출처: 버니 샌더스 SNS

 

2016년 대선에서 샌더스가 선전한 커다란 원인이 그의 정치에 대한 동의만이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과 유색인종의 비중이 높아져가는 민주당 주류에 대한 백인들의 반감이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듀크 대학의 애슐리 자르디나 교수는 2016년 대선 경선의 샌더스가 뉴딜 이후 전통적으로 민주당 경선에 참여해오던 백인 저학력층 유권자들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흡수했고, 이것이 오클라호마, 웨스트버지니아, 아이다호, 미시간 등에서 대선전하는 발판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오히려 샌더스의 정치 플랫폼이 훨씬 다원화되었던 2020년 경선에서는 바이든이 해당 주들의 경선에서 전부 샌더스를 꺾었다. 2016년 샌더스 캠페인이 젊은 유권자들과 사회운동 전반에 큰 에너지를 불어넣었음은 명백하나, 선전한 캠페인의 배경에는 의제와 입장 이상의 복잡한 단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샌더스는 미국 사회에 대한 일정한 반사판의 역할을 했지만 백인 저학력 유권자들의 불만을 진보적 정치화로 이어 나가는 데에는 실패했다.

 

덧붙여 녹색당의 질 스타인을 유의미한 진보정치의 모델로 보는 것은 더더욱 불가하다. 이는 정치 플랫폼과 접근 방식 이상의 문제로, 과연 질 스타인 캠페인을 유의미한 정치 주체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질 스타인 캠페인은 16년과 24년 선거에서 모두 반발표 획득만을 중점으로 삼은 캠페인을 진행했다. 상기 언급한 바와 같이 샌더스의 돌풍이 일정 부분 반사판의 기능에서 그쳤다고 한다면, 스타인의 캠페인은 그 이상으로 한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으며, 무엇보다 대선 이후의 정치 활동에 있어 어떠한 비전과 행동도 보이지 않아 진지한 정치 집단으로서의 자격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었다. 4년 동안 활동이 없다가 대선 때만 반발표 추수를 위해 등장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목표는 아닐 것이다. 후보 등록 및 선거운동 과정 전반에서 공화당 측의 지원을 마다하지 않는 등 제3정당이 양당의 도구로써 활용되는 상황에 실질적으로 공조하고 있다는 점과 2016년 재검표 소송 모금액의 불투명한 유용 및 횡령 의혹 역시 질 스타인을 둘러싼 핵심적인 문제들로,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및 현재 모습과는 상당히 맥락이 다르다.

공화당의 질 스타인 지원 의혹을 제기하는 <월스트리트저널> 기사. 출처: 월스트리트저널 www.wsj.com

 

하나의 인물이, 하나의 의제가, 하나의 정책이 노동계급을 관통하는 마법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각기 다른 공동체를 둘러싼 맥락과 인식의 차이, 절대적인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 시작점이 될 수밖에 없다. 매니페스토, 혹은 깃발을 들어올려 동지를 모으는 조직 방식은 파편화된 21세기 현대사회, 특히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구현이 불가하다. 정치 조직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은 각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위스콘신 북부 농업 행사에 가서 농부들과 어울리며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코리아타운과 차이나타운 한복판에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제1세대 이민자들과 어울리며 설득할 수 있는 사람. 오하이오 동부의 몰락한 공업 지대에서 마을의 미래에 대해 스스럼 없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 반드시 특정한 정체성을 가질 필요는 없으나, 그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고 부대끼며 피부의 감각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사람들이 잔뜩 필요하다. 그 사람들을 찾아내고 지원하며 준비시키는 것이 21세기적 진보 플랫폼이리라. 미흡한 예시이나 2020년 대선 경선에서 샌더스가 라틴계 운동가들과 협업해 지지를 끌어모은 것이 참고점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회에는 그 사회만의 고유함이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정치 문화가 있고, 피부로 경험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정서가 있다. 타국의 사회와 정치에서 통용되는 규칙은 한국에서 무의미할지도 모르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타국의 선거로부터 섣불리 한국 사회에 적용할 만할 교훈을 도출하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는 총체적인 이해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생각된다. 한국의 진보정치가 미국 정치에서 눈여겨 보아야 하는 부분은 개별 의제나 전략, '정치적 모델'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게도 이민자로 대표되는 '타자'의 유입과 가시화가 지속되고, 문화적·계급적 차이에 따라 거주 공간이 분리되기 시작하며, 기존의 제도 및 기관들이 불만을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 전반에 대해 집중할 때, 새로운 세대의 진보정치를 위한 나침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도모>의 편집 방향 및 전환의 입장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제인

정치학도. 미국과 동아시아 정치에 큰 관심이 있다.

개인의 정치 의식화 과정과 정체성 정치 속에서 진보정당운동의 기회를 찾고 있다.

국경을 자주 바꾼다.


각주

  1. 총 투표수만 1억 5천만이 넘고 연방제인 미국의 특성상 여전히 개표가 100% 완료되지 않았지만, 11월 25일 현재 기준 집계된 총 득표율은 트럼프 49.9% - 해리스 48.3%으로 접전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dition.cnn.com/election/2024/results/president?election-data-id=2024-PG&election-painting-mode=projection-with-lead&filter-key-races=false&filter-flipped=false&filter-remaining=false 참고. [본문으로]
  2. 선거의 승패는 전국적 득표율, 선거가 치러진 지역의 당파성과 흐름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판단했다. [본문으로]
  3. 크레이머 교수가 수년 간 위스콘신 곳곳의 시골 지역을 방문해 수집한 구술을 토대로 작성한 책으로, 16년 대선 이후 큰 주목을 받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