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윤석열을 낳은 대한민국을 넘어라: 제7공화국 건설을 위한 한국 사회운동의 논의들
비상계엄 이후 대통령의 탄핵과 조기 대선이 가시화되면서, 국민의힘과 민주당에서부터 소수 야당들까지 모든 주요 정치세력이 개헌을 화두로 소환하고 있다. 윤석열 퇴진 너머, 윤석열을 낳은 한국 사회를 넘어서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논의가 필요한가?
2024년 12월 3일. 이 날을 그 누가 잊을 수 있을까. 밤 10시를 넘긴 늦은 시간, 윤석열 대통령(이하 윤석열)은 돌연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후 11시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어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하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1고 명시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2
그 이후는 모두가 알고 있는 바다. 국회 앞에서 계엄군에 맞선 시민들의 항쟁, 국회의 계엄해제 결의안 가결, 두 차례의 표결을 통한 대통령 탄핵소추, 검찰과 공수처의 윤석열 내란수사,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과 관련한 분쟁으로 인한 탄핵,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같이 광장과 거리를 매우는 수십 수백만의 시민들. 하루하루 정세가 바뀌는 탓에 관련 뉴스를 따라가려면 밤잠을 설쳐야 할 정도다. 8년 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한참 뛰어넘어, 박정희 정권 때의 유신 쿠데타에나 비견될 수준의 정치적 위기로 지금 대한민국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소수 극우 세력을 제외하면 윤석열의 계엄 선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차후 이와 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한 대응책 중 하나로 제6공화국의 오랜 '떡밥' 중 하나인 개헌이 다시 제시되고 있다. 대통령에게 모든 행정권한이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다원주의적 정치문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양당제로 대표되는 '87년 체제' 가 지금과 같은 정치적 파행을 가져왔으니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당에서는 권성동 원대대표와 오세훈 서울시장이 3, 야권에서는 김부겸 전 국무총리 4와 유인태 전 국회사무총장 5, 이철희 전 청와대 정무수석 6 등이 언론과 SNS를 통해 개헌 관련 논의에 불을 지피고 있다. 원내정당 중에서는 조국혁신당 7과 진보당 8이 당론 차원에서 개헌 의제를 본격화하고 있다. 9
주요 언론들 역시 이번에는 개헌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편집장의 말을 통해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품고 있는 87년 체제의 퇴장을 논의할 필요도 있다"는 의견을 전한 《한겨레21》, 2025년 신년기획 '더 나은 민주주의로'를 통해 개헌 관련 논의를 특집으로 전한 《경향신문》 10, 현재의 개헌 논의를 "제도를 바꿈으로써 잘못된 리더를 뽑을 확률을 줄여보자는 몸부림"으로 평가한 《주간조선》 11 등 12성향을 막론하고 개헌에 찬성하는 언론이 대부분이다. 국민 여론도 나쁘지 않다. 계엄선포 후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데일리안》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는 60% 넘는 응답자가 개헌에 찬성한다고 답했으며, 새해를 맞아 《중앙일보》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는 약 60%의 응답자가 대선 전에 개헌이 이루어지는 것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13 한국의 진보좌파 정치 14·사회운동은 87년 체제를 넘어 '제7공화국'을 열자는 이러한 범국민적 여론에 대해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정치개혁이냐 사회개혁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6월 민주항쟁의 성과에 힘입어 9차 개헌으로 수립된 제6공화국 체제는 1961년 이후 지속되어 온 군사정권을 종식시키며 민주화의 시대를 열었던 역사적 진일보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그 시작부터 여러 문제점들을 내재하고 있었다. 우선 당시 개헌 과정을 전두환과 노태우가 소속된 집권여당으로서 청산의 대상이던 민주정의당 국회의원들이 주도했다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에 789 노동자대투쟁으로 대표되는 당시 민주화 투쟁 내부의 보다 급진적이고 노동해방적인 시류는 개헌 과정에 반영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형 대통령제가 지니는 권력집중적인 면모 역시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당시 여야의 개헌 협상은 민주정의당과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에서 각각 4명씩 선출된 비공식기구인 '8인 정치회담'을 통해 비밀리에 주도되었는데, 이들은 대통령 직선제 선출에만 합의했을 뿐 제3공화국 이후 이어진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 자체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15 이는 김영삼, 김대중 등 당시 대권을 노리고 있던 야권 주요 의사들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물이었는데, 정치학자 서희경은 이러한 8인 정치회담의 야합적인 면모가 '사당화된 정치(personalized political party)' '사시화된 정치(privatized politics)'의 적나라한 사례였다 비판하며 대통령을 선출한 집권당이 절대권력을 누리며 승자 독식과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 폐해의 원형이라고 주장한다. 16 17
이 때문인지, 제6공화국의 역사에는 개헌 논의가 상당히 빈번하게 등장한다. 1990년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간 진행된 3당 합당의 이면에는 합당 후 내각제로 개헌을 해 차기 권력을 창출한다는 사전 합의가 있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단일화하여 정권창출에 기여한 김종필의 경우에도 단일화 조건 중 하나로 정부 출범 이후 내각제 개헌을 내세웠다. 노무현의 경우에는 2002년 정몽준과의 단일화 과정에서 정부 출범 후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있었으며, 이후 집권 3년차인 2005년 재보궐선거 참패 이후 제1야당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과 함께 대통령 4년 연임제로의 개헌을 제안하는 등 정치적 위기 상황마다 개헌 관련 논의는 다시 등장했다. 이후 등장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역시 임기 중 개헌을 여럿 제안했으며, 지난 2016-17년 촛불 항쟁의 결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경우 2018년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를 진행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으나 야당과의 합의 결렬로 무산된 바 있다.
이처럼 제6공화국 내내 개헌 관련 논의가 이토록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개헌에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현실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관련 논의들이 일반 국민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크다. 앞서 살펴보았듯 그동안 한국 정치권 내에서 개헌논의는 신진 세력이 아닌 이미 대중들에게 익숙한 주류 정치인들로부터 진행되었으며, 그마저도 대선 등 주요 정치적 이벤트를 앞둔 시점이나 집권세력이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때 제한적으로 제시되었다. 이에 따라 일반 국민들의 정서 속에는 이와 같은 논의들이 민주주의 확대를 위한 진지한 제안이라기보다는 정치인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을 위하는 야합에 가깝다는 식의 불신이 팽배해졌고, 결국 동력을 잃고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개헌 등 주요 정치개혁 의제들이 내 삶과 직접 연관되는 '먹고사니즘'과 괴리된 문제라는 인식 역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에 한 몫 했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한국의 사회운동과 진보정당은 기성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며, 다당제 성립을 위한 선거제 개혁에 더욱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97년 대선 당시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대선 후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내각제 개헌 논의에 대해 '보수야합'이라며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 때 제시된 개헌안에 대해서도 반응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의 경우에는 4년 중임 대통령제나 결선투표제 등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 하는 문제보다 지역주의를 온존시키는 현재의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바꾸는 선거제도 개선이 더 중요하다" 18는 선결조건을 달았으며, 2007년 4년 중임제 개헌에 초점을 맞춰 제기된 정부의 '원포인트 개헌안'에 대해서도 초반에는 "국민들의 필요에 의해 개헌을 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19라며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후 조건부 찬성에 가까운 입장으로 선회하는 등 냉온탕을 오가는 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20 21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 내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추진을 놓고 충돌했던 민주노총 역시 "재집권에 몰두한 집착"이라며 냉소적인 평가를 내렸다. 한때 비(非)NL 계열 진보좌파운동의 세력권을 양분했던 사회진보연대와 다함께(현 노동자연대) 역시 자신들의 기관지를 통해 노무현의 개헌안이 "개헌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열린우리당의 분당 사태에 제동을 거는 한편, 대선 판도와 이 안의 함수관계를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놓고 한나라당을 흔들려는 정략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 22 "개헌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돌려, 온갖 배신과 개악이라는 진정한 문제를 흐리고, 집권 여당의 분열을 봉합하고, 개헌을 둘러싼 찬반으로 구도를 변화시켜 지지층을 다시 결집시키려는 것" 23이라며 혹평했다. 24
앞서 말했듯 그동안 한국 정치권 내부의 개헌 논의들이 시민적 요구와 괴리되어 왔기에, 이러한 진보좌파 정치사회운동의 요구에는 일면 타당한 지점이 존재한다. 기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진보좌파 세력이 본질적 사회개혁을 회피하는 기득권 집단의 개혁 논의들과 온전히 합일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경향성이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제6공화국의 핵심적 정치 모순과 직면하고 그 병폐를 해결하는 일을 부차적인 과제로 여기며 등한시해 온 것 아니냐는 비판 역시 가능하다. 제6공화국식 대통령제가 전국민의 눈 앞에서 폭주하며 스스로에게 사망선고를 내린 이번 계엄 이후에는 더더욱 그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계엄 사태 발생 1년 전에 쓰여졌지만 승자독식과 양극화로 대표되는 제6공화국의 그늘에서 성장한 윤석열로 대표되는 검찰 카르텔이 주도하는 한국정치의 현 주소에 대해, "제6공화국(의 말기만이 아니라) 전체를 넘어서는 정치 문법을 수립할 새로운 정치 행위자와 양식, 관행이 등장해야 한다"고 역설한 장석준의 글이 시의적절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25
노회찬 '제7공화국 건설운동'에서 정의당 헌법개정안까지: '남태령 민주주의'를 위한 오래된 미래?
한국의 진보좌파 정치·사회운동은 대체로 정치체제 등 형식적 차원에서의 개헌에 대해서는 다소 소극적인 관심을 보였지만, 시민권 확대나 사회개혁 등과 관련한 내용적 차원에서의 개헌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보여 왔다. 토지공개념 삽입이나 냉전적 영토조항 삭제 등 많은 의제들이 관심을 불러모은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익균점권 등 향후 개헌 과정에서 잊혀진 제헌헌법 내의 진보적 경향성에 주목했다.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경선에서 노회찬 후보가 내세웠던 '제7공화국 건설운동'은 그 중 가장 구체화된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노회찬은 거대양당 모두가 지지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를 비판하며 "노동자·농민·서민의 정당이 직접 정치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민자당계 정치세력과 민주당계 정치세력이 주거나 받거니 하며 이어온 제6공화국의 정치적 경향성과 완전한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1960년 4.19 혁명과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 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져 온 노동자·농민·서민의 대투쟁이 지향하는 궁극적 가치"인 평등과 통일을 양대 가치로, 제7공화국 건설을 위한 26새로운 정치사회운동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노회찬은 제7공화국 수립을 위한 구체적인 11개의 테제를 제안한다. 해당 테제들은 노동('<제7공화국>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고, 완전한 노동3권을 보장한다')과 사회권('<제7공화국>은 교육, 의료, 주택, 일자리를 국가가 책임진다' '제7공화국>은 전력, 가스, 철도, 통신, 공적금융 등 공공성이 강한 기업이나 기관을 사회화한다')은 물론이고 농업('<제7공화국>은 농업을 국가공공산업으로 규정하며, 식량주권을 지키고 국민의 식생활안전을 보장한다'), 차별철폐와 성평등('<제7공화국>은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소수자에 대한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다' '<제7공화국>은 모든 영역에서 성평등의 가치를 실현한다'), 생태('<제7공화국>은 환경정의를 실현하고 생태친화적인 녹색국가를 건설한다'), 반전평화('<제7공화국>은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 실현을 국가의 임무로 한다') 등 대중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진보적인 의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27
더불어 이를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는 경제 국가기구인 '평등경제위원회' 설치, 현재의 건강보험체계에서 조세지출 방식 국민건강체계로의 점진적인 전환, 한반도의 평화체제와 비핵지대화 실현, 영세중립국 천명, 성소수자 가족 등 다양한 생활동반 가정 보장, 분권적 재생가능 에너지 체제 설립, 국민탄핵제와 국민소환제 보장 등의 구체적인 방안들 역시 명시되어 있다. 비록 경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당선으로 인해 제7공화국 정치운동은 그저 하나의 제안으로만 남게 되었지만, 이 제안의 의의는 당시 한국 진보진영이 최초로 제시한 87년 체제 극복을 위한 구체적 제안이라는 데에 있다. 이 때 제시된 '제7공화국' 슬로건은 이후 2022년 김윤기 정의당 당대표 후보의 제7공화국 건설운동 공약, 2024년 제22대 총선 녹색정의당의 제7시민공화국 개헌 공약 28 등으로 계승된다. 29
노회찬의 제7공화국운동 제안은 촛불 이후 20대 국회에서 정의당이 정당 중 최초로 발표한 개헌안인 <국민을 위한 헌법 개정안>으로 발전된다. 해당 개정안은 전문에 4.19민주이념에 더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6-17년의 촛불항쟁을 계승한다고 명시하는 동시에, '노동이 존중되는 사회정의 실현'과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세상'을 추구해야 할 사회상으로 제시했다.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세상' '모든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변화'에 대해서도 명시해 생태주의적 지향 역시 명확히 했다. 또한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국가이다'라는 3항을 신설하여 지방분권과 자치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차별금지 사유에 '인종·언어·장애·연령·지역·성적지향·고용형태'에 대한 언급을 추가하고 아동과 장애인의 권리보장을 강화하는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헌법에 반영했다. 노동권의 확대 보장은 물론, 안전건과 건강권, 정보기본권, 소비자권리, 망명권, 사상의 자유 보장, 저항권에 대한 구절 역시 신설했다. 이는 당시 모든 사람의 일할 권리(부당해고로부터 보호 및 직접고용 원칙) ▲적정임금,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노동3권의 온전한 보장 ▲사기업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복원과 노동자의 경영참가권 보장 ▲기반시설 공공서비스와 보건의료 공공성 원칙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의 실질화 ▲성평등 권리의 구체화, 실질화 ▲안전권과 건강권의 확대를 골자로 한 '노동헌법' 개헌을 주장한 양대노총의 제안 30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노회찬의 제7공화국 테제에서 한 발 나아가, 지금까지 한국의 진보적 정치사회운동이 제시한 가장 포괄적이고도 구체적인 개헌안으로서 그 의의가 있다. 31
그러나 이러한 제안들이 단순 법리적인 공리공론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직업정치인들만의 활동을 넘어 의사당 밖 평범한 시민들의 목소리와 활발한 화학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중의 지지가 없는 개헌 시도가 좌초될 수밖에 없다는 명제는 기성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계엄 정국 이후 광장과 길거리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다원주의적 목소리들, 특히 남태령에 모여 수십여 시간을 버티며 결국 경찰에 맞서 길을 뚫을 수 있던 농민, 청년,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들의 목소리와 같은 새로운 정치사회적 변화의 주역들 32과 만날 때, 한국 진보좌파 정치사회운동의 제7공화국 건설운동은 비로소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33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지금까지 나왔던 '진보좌파 제7공화국 건설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이제는 더는 정치개혁과 관련된 개헌논의들을 회피할 수 없다. 설사 전통적인 좌파적 도식에 따라 정치체와 관련된 모순이 사회경제적 모순에 비하면 '부차적 모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바로 그 '부차적 모순'이 나라 전체를 휘청거리게 만들고 있는 지금 이에 대한 요구를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이 등한시하는 것은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든 의원내각제든, 무엇이 보다 민중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정치체인지에 대한 논의를 내부적으로 이어나가야 한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한국 사회 전체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토대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을 촉진할 수 있는 내용을 헌법 내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인도의 니렌드라 모디,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 대통령 중심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주의에 친화적이라 여겨지는 의원내각제 치하에서도 극우 권위주의 세력이 장기집권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경제적 불평등이나 사회적 차별 등 해당 정치의 토양이 되는 경제·사회적 조건들이 개선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은 7공화국 건설이 이러한 ‘반쪽짜리 혁명’ 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사당 내 직업 정치인들 간의 논의를 넘어 담장 밖 시민들의 목소리와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21대 국회에서 선거제 개혁을 둘러싼 정의당의 행보는 이에 대한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어 준다. 당시 정의당은 촛불 정국에 힘입은 정치적 상승세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다 광범위한 대중 기반 확보의 마중물로 삼기보다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해 기성정당들과의 협상에 필요한 지렛대 정도로 여겼으며, 그 과정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협조를 위해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 찬성 등 스스로의 원칙을 배반하기도 했다. 그 결과 대중들에게 선거제 개혁의 정당성을 설득시키는 데에 실패했음은 물론, 그마저도 거대 양당의 비례위성정당 창당으로 인해 유명무실해지며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되고야 말았다. 그 어떤 정당이나 운동도 대중보다 앞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34
한국의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은 지난 박근혜 퇴진 정국 당시 자신들의 역량을 투입해 탄핵을 성사시키며 정치·사회적 모멘텀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전략의 부재 때문에 정국의 주도권을 민주당에게 빼앗기고 이후 국정농단 세력의 재집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맞이한 지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명확한 정치적 비전과 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탄탄한 대중적 기반 모두를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오늘의 제7공화국 건설운동이 단순한 탁상공론에서 그치지 않고 건설'운동'으로서 성공하기 위해 명심해야만 할 지점들이다. 35
김원
동국대학교 맑스철학연구회 회장, 전환 경기 회원. 동국대학교와 고양시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넓고 멀리 보는 이론과 구체적인 공간에서의 실천을 겸비한 운동을 지향한다.
각주
- https://www.youtube.com/watch?v=N3GLj_4WkT4 [본문으로]
-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21944 [본문으로]
- http://www.realmeter.net/%EB%A6%AC%EC%96%BC%EB%AF%B8%ED%84%B0-%E5%B0%B9-%EB%8C%80%ED%86%B5%EB%A0%B9-%EB%B9%84%EC%83%81%EA%B3%84%EC%97%84-%EC%84%A0%ED%8F%AC-%EC%82%AC%ED%83%9C-%E2%91%A0-%ED%83%84%ED%95%B5/ [본문으로]
- https://www.mk.co.kr/news/politics/11201173 [본문으로]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2901 [본문으로]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4086 [본문으로]
-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6590.html [본문으로]
- https://www.news1.kr/politics/general-politics/5637161 [본문으로]
- https://www.jinboparty.com/pages/?p=286&b=B_1_111&m=read&bn=12245 [본문으로]
-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6590.html [본문으로]
- https://www.khan.co.kr/article/202501011602001 [본문으로]
-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9062 [본문으로]
- https://dailian.co.kr/news/view/1439143 [본문으로]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4396 [본문으로]
- https://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502885 [본문으로]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4071467124936 [본문으로]
- 서희경, 『87년 체제의 한국헌정사 1987-2017』, 도서출판 포럼, 2023, p 201-203 [본문으로]
-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09/30/1997093070283.html [본문으로]
-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2602.html [본문으로]
- https://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183642.html [본문으로]
- https://vop.co.kr/A00000061446.html [본문으로]
- https://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1142&page=4&total=77 [본문으로]
- https://www.pssp.org/bbs/view.php?board=j2021&nid=3498 [본문으로]
- https://ws.or.kr/article/3742 [본문으로]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121117175365868 [본문으로]
-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76 [본문으로]
- https://archives.hcroh.org/hcroh/archive/srch/ArchiveNewSrchView.do?i_id=51606 [본문으로]
- https://www.facebook.com/share/p/1Tx3vszJL6/ [본문으로]
- https://www.justice21.org/newhome/board/board_view.html?num=162719 [본문으로]
- https://www.justice21.org/newhome/board/board_view.html?num=102934 [본문으로]
- https://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247112&page=2&total=77 [본문으로]
-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6591.html [본문으로]
- https://www.newscham.net/opinions/column/c53/111483/?page=1 [본문으로]
- https://platformc.kr/2023/10/justice-party-lacks-basic/ [본문으로]
-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5525 [본문으로]
'기획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석열 퇴진을 둘러싼 한국 사회운동의 딜레마 (0) | 2024.12.02 |
---|---|
두 개의 한국: 평화공존을 가로막는 '목적론적 통일주의' (0) | 2024.11.01 |
907 기후정의행진: 함께한 기억들, 남겨진 질문들 (0) | 2024.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