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두 개의 한국: 평화공존을 가로막는 '목적론적 통일주의'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다시 한 번 고조되고 있다. 김정은은 조선과 한국이 완전히 분리된 '2개의 적대적 국가'임을 천명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을 시작했고, 좌우 양쪽에서 금기시되어 왔던 두 국가론이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고개를 들고 있다. 남북 양쪽에서 통일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는 지금, 진보정치의 대안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우크라이나와 북한, '파병 여부'는 핵심이 아니다
최근 몇 주간 모든 언론사 국제면의 헤드라인을 장식해 온 기사는 단연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에 대한 기사일 것이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10월 18일 보도자료를 통해 조선인민군 4개 여단 12,000여명의 파병이 결정되었음을 주장했고, 이후 23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북한군 파병에 대한 증거를 확보했음을 밝혔다. 여전히 파병 규모나 병력 구성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지난 25일 북한 외무성은 입장문을 통해 "만약 지금 국제보도계가 떠들고 있는 그러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국제법적 규범에 부합되는 행동일 것"이라며 간접적으로나마 파병 사실을 시인했다. 이후 푸틴 대통령 역시 BRICS 정상회의에서 미국 기자의 북한군 관련 질문에 파병을 부인하지 않으며 "북한과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라 밝혔다.
사실상 확실해 보이는 북한의 파병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북한이 했으니 우리도 한다"는 식으로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검토를 본격적으로 시사하며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언론에 유출된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과 신원식 국방부 장관 간 텔레그램 메시지에는 "우크라이나와 협조해 북괴(북한)군 부대를 폭격하고 이를 북한에 심리전으로 사용하자"는 내용까지 들어가 있고, 보수 인사 일각에서는 "이 참에 우리도 우크라이나에 국군을 파병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도 등장하는 상황이다.
반면 이와는 정반대로, 국내 진보정당 및 진보운동 세력 일각에서는 여전히 북한의 파병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 지난 10월 29일 진보당이 주최한 국회 토론회에서 전쟁 초기부터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해 온 이해영 한신대 교수 등 주요 참석자들은 "북한군 파병설은 국정원과 미국의 완전한 조작이다" 등의 주장을 꺼냈고, 구 NL(민족해방) 계열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다수 참석한 토론회 현장에서는 해당 주장에 대한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미국과 NATO의 정보에 불확실성이 있을 수 있다 가정하더라도, 북한 외무성과 러시아조차 간접적으로 시인한 사실에 대해 전면적 부정을 거듭하는 것에 대해서는 운동사회 내에서조차 극단적이고 음모론적이라는 비판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전환 집행위원장을 지낸 나경채 정의당 기획실장은 SNS를 통해 “파병 부인, 파병조작설이 진보당의 공식 의견은 아니길 빈다”며, “지금 중요한 것은 파병을 빌미로 한국 정부가 전쟁에 더 깊게 개입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중적 인식과 동떨어진 생각을 기초로 해서는 될 일도 안 되기 마련이다”며 진보당의 입장을 비판했다.
맥락이 소거된 현상 진단은 정파적 입장의 극단화로 이어진다. 북한군의 파병에 대응하여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와 병력을 지원하고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여하겠다는 극단적 발상과, 북한군의 파병을 전면 부정하는 음모론이 갖는 공통점은 자신들의 국내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고자 현재의 상황을 주관적으로 대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급격화되는 북-러의 밀착과 파병 결정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위해서, 그리고 북한군의 파병을 빌미로 한 윤석열 정부의 전쟁 확대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두 국가론’을 전면화하며 정상국가로서의 외교전을 펼치고 있는 북한의 최근 노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조선민족도, 자주통일도 이젠 사라졌다
지난 2024년 10월 7일 평양에서는 김정은국방종합대학(구 국방종합대학) 창립 6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본인의 이름을 붙여 얼마 전 개명한 북한 국방과학연구의 최전선에서,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진행한 연설은 북한의 새로운 외교 노선을 다시 한 번 명확히 천명했다.
"대한민국이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우리가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방법은 이렇게 간단합니다. 우리를 때 없이 건드리지 말며 우리를 놓고 《힘자랑》 내기를 하지 않으면 될 일인데 그렇게 쉬운 일을 할 위인도 서울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의식하는 것조차도 소름이 끼치고 그 인간들과는 마주서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전 시기에는 우리가 그 무슨 남녘해방이라는 소리도 많이 했고 무력통일이라는 말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이에 관심이 없으며 두 개 국가를 선언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 나라를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024년 이후 남한을 향해 이어지는 북한의 외교적 수사는 과거 보수정부 집권기 김정일 정권의 수사와 언뜻 유사해 보이지만, 그 적대적 표피 아래 깔린 과거와 현재의 본질적 차이는 더 이상 남한을 ‘통일의 대상’ 혹은 ‘하나의 민족’으로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한의 국체를 지칭하던 《대한민국》 혹은 "대한민국"이라는 표기에서 겹괄호와 따옴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이들이 절대로 인정할 수 없던 남측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역설적 방증이다. 조선민족, 동포, 자주통일 같이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수사는 물론 완전히 사라졌다.
1972년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과 북의 모든 정권은 상호 간의 관계를 '국가 간의 관계에 준하는 특수관계'로 칭하며 최소한 명목상으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반한 통일을 지향해 왔다.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이어 김정은 정권 초기까지도 이어져 온 이 기조가 180도 변하기 시작한 시점은 문재인 정부의 평화 프로세스가 완전한 실패로 귀결된 하노이 회담 이후였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이 어떠한 미국의 입장 변화도 실제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체감한 북한은, 일단의 대화조차 거부하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경제개방과 교류에 기초한 남한 주도의 평화정책을 거부하고 '정상국가'로 스스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생존을 위한 외교적 행보를 시작했다. 그 행보는 지난 6월 북러정상회담에서 체결된 '북러 간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이 단순하게 흔히 체결되는 국가 간의 동맹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른바 '신냉전'으로 칭해지는 현재의 구도 속, 대러시아주의를 표방하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이미 아프리카와 중동의 일부 국가들과 접촉하며 새로운 반서방 정치경제블록을 형성하고자 노력해 왔다. 하노이 회담 이후 남한 - 정확히는 일련의 기대감을 심어 주었던 민주당 정권 - 과 미국에 대한 모든 기대를 내려놓은 북한의 판단은 더 이상 '통일'이라는 구호가 체제 유지에 유의미하지 않다는 것이었고, 민족 간 대화와 평화통일을 대신하게 된 북한의 대안은 러시아 주도 반서방 블록에의 적극적 편입과 동시에 남한에 대해 '적대적 두 국가'를 선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특수관계'의 전제를 파기하는 것이었다.
'우리 안의 북한'을 깨자
적대적 두 국가를 선언하며 이른바 '자주민주통일' 노선을 먼저 포기한 북한에 대해, 남한에서도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민주당, 그리고 '진보진영' 전반에 논쟁을 불러온 지난 9월 임종석 전 실장의 "두 개 국가를 수용하자" 발언에 이어, 과거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10월 13일자 한겨레 칼럼을 통해 "햇볕정책까지 내려놓고 백지에서 대북정책을 다시 시작하자"는 주장을 제기하여 다시 한번 잔잔한 파문을 던졌다. 1그는 "민주평화진영의 '가난하고 고립된 북한'의 소비 방식은 조선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들고 나와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우리 내부의 교조적 허위의식을 타파해야 함을 역설한다.
정욱식 소장의 주장은 과거 자주통일의 투사였고 현재 햇볕정책과 평화통일의 전도사인 민주당 86세대 정치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한국의 주류 우파 진영은 여전히 시대착오적 '북한붕괴론'을 재소환하며 곧 붕괴할 '가난하고 고립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 주는 것이 북한 붕괴 후 도래할 통일 한국의 이니셔티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도 임종석 실장을 비롯한 남한 사회 일각의 '두 국가론 수용' 주장이 북한의 체제를 대신 수호해 주는 것이라는 매카시즘적 비난을 일삼는다. 물론 1990년대 고난의 행군에도 붕괴하지 않은 북한이 근시일 내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은 여러 가능성을 감안하여도 현실과 거리가 멀다.
이처럼 명확하게 보여지듯 보수정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주류 진영의 북에 대한 진단은 ‘가난하고 고립된 북한’이라는 우리의 상상을 물신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방식이 다를 뿐 흡수통일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차이점은 가난한 북에게 경제적 이니셔티브를 쥐여 주어 국제 사회로 나오게 하고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체제에 흡수시켜 평화적으로 통일하겠다는 온건한 방법론을 취하는지, 혹은 가난한 북을 끝까지 고립시켜 붕괴하면 그 폐허를 흡수하겠다는 강경한 방법론을 취하는지일 뿐이다. 2023년 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 올라온 김정은의 보고는 현재의 북한이 이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 제도와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괴뢰들의 흉악한 야망은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2
한국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 동시에 1990년대 북이 겪었던 고난의 행군은 어느 순간 한국인들 스스로가 '우리 안의 북한' - 즉 가난하고 지원의 대상인, 어쩌면 곧 붕괴할 수도 있을 극빈국가로서의 북한을 물신화하게끔 했다. 햇볕정책이 처음 가동되었던 20여 년 전 당시 그것은 일정 부분 북에 대한 유효한 진단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로부터 이미 사반세기의 시간이 흘렀다. 북이 정상국가를 지향하며 러시아라는 새로운 협력자를 통해 일정한 경제적, 정치적 성과를 올리고 있는 상황임에도 한국 사회 주류 정치권의 담론이 그 당시의 논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우리 안의 북한'을 상수로 상정하였기에 결국 실제 북한의 현재를 파악하는 데 나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이 불가능한 본질적 이유는 북의 ‘비이성적 행동’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내재한 북에 대한 허위의식과 확증편향 탓일지도 모른다.
목적으로서의 평화와 방법론으로의 통일을 위해
진보정당에게 가해지는 '민주당 2중대(혹은 국민의힘 2중대)'라는 공격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마타도어이지만, "진보정당이 스스로의 정책적 브랜드를 구축하지 못해 몰락했다"는 지적은 진보정당 내에서도 많은 공감을 얻는 주장이다. 외교안보 및 통일 문제에 있어서 "정의당의 정책은 정말 ‘민주당 2중대’나 다름없었다"는 혹자의 평은, 즉 진보정당이 주류 양당과 다른 평화정책의 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민주와 보수 양측이 다른 방식으로 흡수통일을 지향할 때 진보정당은 선제적으로 '우리는 흡수통일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즉 모든 방식의 흡수통일을 전제하지 않는 평화와 공존이 진보정당의 지향점임을 명확히 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실제로 구 제국주의의 식민지였으며 외세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에서, 북한의 집권세력과 남한의 진보세력 양측에게 이른바 ‘자주민주통일’은 항상 핵심적 과제로 여겨져 왔다. 지금 북한은 이미 ‘조선민족’과 ‘한민족’이 국민주의적(National) 관점에서 별개의 두 민족으로 분리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지만, 남한 주류 정치세력의 다수는 여전히 북한을 ‘목적론적 통일’ - 즉 ‘같은 민족이기에’, ‘본래 하나였기에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정도의 관념적 통일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자유통일'과 '자주민주통일'은 이 점에서 동일한 전제를 가지기에 유사하다. 그러나 북한은 국가 단위에서 통일을 거부하고 남한에서는 통일에 대한 회의론이 크게 대두하는 지금, 여전히 통일 그 자체를 목적으로만 사고한다면 오히려 그 목적을 달성하는 길에서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관념적으로, 목적으로서 통일을 사고하는 것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정치세력에게 한반도 문제에 대한 목적의식은 당연히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진보좌파 세력에게 있어 명확한 하나의 지향과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다소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반전평화’일 것이다. 평화가 절대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자리잡는다면, 통일은 지금의 관념성과 허구성을 내려놓고 유물론적 관점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해 통일을 외치는 것이 필요한 정세에서 통일 담론은 물론 유효하지만, 통일이라는 전제가 남과 북 모두에서 거부당하고 있는 지금 여전히 통일만을 외치는 시대착오적 판단은 심지어 ‘평화의 필요성’조차도 대중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통일연구원(KINU)의 <2024 통일의식조사>에 따르면 2024년 4월 기준 '통일'과 '평화공존'의 두 가지 선택지 중 평화공존을 선호하는 비율은 무려 58%에 달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두 국가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남한의 대다수 시민들이 현재 원하는 대안 역시도 통일이 아닌 ‘평화공존’임을 명확히 인지한다면 결국 그 동안 한국의 통일론을 지배해 온 자유통일-자주민주통일이라는 두 가지 테제로 더 이상 평화에 다가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문제의 진정 ‘진보적 대안’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간 한반도에서 외교안보정책의 진보성은 대체적으로 그 정책 자체의 내용보다는 타 행위자들, 즉 미국과 일본 – 북한, 중국, 러시아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흔히 햇볕정책을 포함한 ‘진보적 외교정책’을 구사했다 여겨지는 민주당 계열 정부에서 평균적으로 보수정부의 그것을 한참 웃도는 군비증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양당 모두가 여전히 북한을 새로운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정책적 디테일이 결여된 관념적 통일주의가 결국 ‘힘을 통한 평화’ 또는 기존 한국 사회의 주류 통일론인 흡수통일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임종석 전 실장이 제기한 ‘두 국가론’은 남과 북이 마주한 현재의 상태를 인정하고 일단의 목적의식을 평화에 집중하겠다는 지점에서 분명 유의미한 진일보이다. 그러나 해당 발언의 당사자인 임 전 실장은 2009년 이후 최대의 군비증강을 감행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더러, 지난 2020년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으로 선출될 당시부터 "통일보다 북방경제가 우선"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주지하였듯이 한국의 주류 정치세력 대다수가 '통일은 대박', '남한의 자본과 북한의 저렴한 노동력의 결합' 정도의 인식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시점에서, 임종석 실장의 평화에 대한 인식 역시도 단지 통일을 유예하고 있을 뿐 결국 남한 자본을 위한 유사제국주의적 신시장 구축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떨치기는 힘들다. 3
그러나 어찌되었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자’를 민주당 계열 일각에서조차 이미 주장하는 시점에서, 진보정치는 그 이상의 대안으로 무엇을 더 주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한반도 문제의 민족관계라는 특수성을 이제는 완전히 내려놓고, 남과 북이 대등하고 양립 가능한 행위자로서 동아시아의 평화라는 하나의 목표에 입각하여 함께 사고하자’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반도 문제는 이미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지 오래이고, 미국-서방 진영 대 중·러-반서방 진영이라는 신냉전적 프레임을 넘어 한반도의 문제를 동아시아 전역의 평화라는 확장된 차원에서 상상하기 위해서는 특수관계라는 틀을 넘어서 대등한 행위자로서의 상호 인정이 필수적으로 선행될 수밖에 없다.
낡은 허위의식과 관념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평화와 방법론으로의 통일을 사고할 수 있는 시점에서 남과 북은 비로소 서로를 대등한 행위자로 인정하고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에 대한 사유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
아마추어 디자이너 일도 가끔 한다.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만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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