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남태령의 사람들, 연대의 기억들: 2부
12월 21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전봉준투쟁단의 남태령 트랙터 투쟁은 정체성을 교차한 우리 시대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밤을 새우고 날을 보내며 농민들과 함께 남태령 고개를 지킨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남태령 투쟁이 우리 운동에 남긴 것들을 되짚어 보자.
#3 남태령에서 용산까지, 그리고 안국역까지: 우리의 해방은 계속된다 (JS)
#4 다시 만난 세계, 새로 만들 세계 (김경일)
#3
남태령에서 용산까지, 그리고 안국역까지: 우리의 해방은 계속된다
남태령에서 밤을 지새운 많은 사람들의 소식을 접하고, 12월 21일 일요일 오후 2시경 남태령역에 도착했다. 사당에서 출발한 4호선 지하철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남태령에서 내렸다. 긴 계단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올라가자 나온 개찰구 앞에는 역무원이 공간 확보를 위해 확성기와 빨간 봉을 들고 사람들에게 이동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다. 개찰구 밖에는 윤석열 퇴진운동 주최측에서 배포한 손피켓을 돗자리 삼아 앉아 있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2번 출구 근처에 붙은 '경찰은 차 빼'라는 손글씨와 함께 집회 장소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인상적이었다.
남태령역 2번 출구로 나가서 친구를 만나 출구 근처에 설치된 간이 의료부스로 향했다. 이번 퇴진집회 내내 운영 중인 의료부스는 내가 현재 활동하는 시민단체인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보건연)'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행동하는 간호사회', '노동건강연대' 등 주요 보건의료운동 단체들의 연대체이다. 평소에는 주최 측에서 의료부스로 사용할 수 있는 천막 하나를 주었고, 특히 대학생인 내가 의료지원 부스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크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의료 행위가 거의 없을뿐더러 환자가 많이 발생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로는 학생회원들과 집회 자체에 참여하거나, 의료민영화 반대 전단지를 배포하거나, 깃발을 드는 등 의료지원과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은 일을 많이 해 왔다. 그러나 그 날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인의협 회원이기도 한 중대재해전문가넷 공동대표 김현주 교수님께서, 당신의 표현을 빌리면 ‘야전병원’을 차려두었다. 갑작스럽게 자생적으로 생긴 집회여서 주최 측에서 의료 부스 천막을 따로 준비할 수가 없었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시민들이 기증한 휴지를 쌓고 그 위에 담요를 깔아 테이블을 만들었다. 기증받은 돗자리와 (보온성이 좋은) 은박지를 이용해 응급환자를 눕힐 수 있는 나름의 간이 침대도 만들어 두었고, 실제로 나중에 활용했다. 의료부스에는 행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두 시간 동안 환자가 100명 이상 방문했다. 옆에서 진료기록을 일일이 쓰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여섯명 정도의 가벼운 환자가 있던 평소 집회에 비해 훨씬 많은 환자들이 들어온 것이다. 농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전날 밤부터 영하의 날씨에서 밤을 샌 시민들이 저체온증 증상을 보이면서 몸을 가누기 힘겨워하는 경우도 여럿 있었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두통, 어지럼증, 몸살, 월경통 등을 호소하는 분들이 정말로 많았다.
그러나 (출근일이 아니셨던) 상근자 선생님께서 뒤늦게 도착하시기 이전에도, 단 한번도 약품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 시민들이 계속 약을 기부해 주었기 때문이다. 타이레놀이나 파스를 한두개씩 사서 기부해 주는 시민분들도 많이 계셨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한 시민분은 근처 약국에 있는 진통제를 '털어 오셨다'고 한다. 시민들이 약품만 나눈 것도 아니다. 김밥, 빵, 도시락 등 음식이 계속 들어왔다. 이러한 시민들의 상호부조는 기부에만 그치지 않았다. 의료 부스 앞에서 어지럼증을 호소하던 환자가 구토를 하려고 하는 상황이 있었다. 의료부스에 큰 봉투를 준비하지 않아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근처에 큰 봉투를 가지고 있던 시민이 상황을 보고 달려와서 환자의 등을 두드려주며 도와주는 상황도 볼 수 있었다.
한편 집회 대오에서는 쉬지 않고 "차 빼라"와 "윤석열 퇴진" 등의 구호가 반복되었다. 4시쯤 되자 경찰 버스가 한두 대 빠졌지만 아직 차벽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 앞으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는, 우리가 힘을 조금 더 보태야 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경찰이 차를 뺐다는 소식을 사회자가 전해 주었고 "우리가 이겼다"는 구호가 반복되었다. 시민들은 사당까지 행진해 이동했고, 보건연 활동가들도 의료 물품을 들고 행진 대오 앞, 중간, 뒤에 나누어 합류했다. 조금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전봉준 투쟁단' 플래카드를 건 트랙터 앞에서 손을 흔드는 전농 활동가들을 볼 수 있었다. 농민들은 행진하는 시민들에게 고맙다고 일일이 인사를 해주고, 시민들도 농민들에게 싸워 주어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는 뭉클한 장면이었다.
이어서 대통령의 관저가 있는 한강진역 근처에서 마무리집회가 진행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밤을 새워 남태령을 지키느라 이탈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강진역 집회에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한강진역에서 내리고 나서부터 사당까지 행진한 후 같이 이동한 시민들이 "체포하라"를 외치며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이루어진 본집회는 시민과 농민의 승리를 기뻐하는 축제의 분위기에 가까웠다. "우리가 이겼다", "체포하라" 등의 구호를 여느 집회보다도 희망차게 외쳤다. 구호를 30분 정도 외치다 보니 사당에서 출발한 트랙터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신해철의 <그대에게>가 흘러나오며, 차선의 절반을 점거하고 시위를 하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왼쪽으로 붉은 트랙터 10대가 지나갔는데, 이때 느꼈던 감동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이날 보여준 시민들의 연대는 남태령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안국역에서 "윤석열, 탄핵! 오세훈 OUT!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 촉구!"를 구호로 내걸고 출근길 지하철 투쟁을 진행했다. 많은 학생 단위들이 결합한다는 소식을 보고 나도 아침 8시에 안국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민되는 사실이 있었는데, 보건연에서 운영하는 '윤석열 퇴진을 위한 보건의료 청년학생 모임(이하 퇴진모임)' 톡방에 행사를 홍보하고 공식적으로 결합할지 여부였다.
200명 가까이 되는 퇴진모임의 구성원 대부분은 보건연 회원이 아니라 이번 퇴진 집회를 계기로 처음 현장에 결합하여 집회 참여 경험이 거의 없는 보건의료 계열 학생들인데, 우선 지난 봄 출근길 지하철 투쟁에 결합했을 때 경찰이 시민들을 물리적으로 끌어내는 일이 많이 있었던 관계로 걱정이 되었다. 나조차도 옆에서 시민을 끌고 나가는 경찰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만으로 대오 밖으로 끌려나간 경험이 있었다. 또한 에브리타임에서 전장연과 연대하는 대학생들을 공격하던 사례가 떠올라 사전 세미나 등 공감대 형성 없이 집회에 결합하면 거부감을 보이는 구성원은 없을까 하는,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나도 부끄러운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동료 활동가들과 짧은 의논 후 자율적으로 전장연 집회에 결합하기로 하고, 늦은 시간에 퇴진 모임 톡방에 전장연 집회에 결합하자는 글을 올렸다. 카톡 글에 좋아요, 하트가 20개 이상 달렸고, 출근을 해야 해서 결합하지는 못하지만 연대한다는 메시지, 내일 같이 가겠다는 메시지 등이 올라왔다. 다음 날 결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서울교통공사에 항의 문자를 넣는 방식으로 연대하자는 메시지도 올라왔다.
언론에도 많이 보도되었지만 23일 아침 안국역의 분위기는 이전의 출근길 지하철 투쟁과는 사뭇 달랐다. 경찰과 서울교통공사는 여전히 전장연 활동가들을 방패로 가로막고 "특정 장애인 단체의 시위로 지하철 운행이 지연된다"는 방송을 계속했지만, 전날 남태령에서 승리의 경험을 한 시민들의 기를 죽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휠체어에서 떨어지자 모인 시민들은 "시민을 보호하라"를 연호하며 항의했다. 이 열기는 이후 이어진 다이인 퍼포먼스와 헌재까지 이어진 행진까지도 지속되었다. 헌재 앞에서 발언한 한 시민은 계엄 선포 다음 날 아침 국회에서 민주당이 주최하는 집회에 참여하며 옆에서 집회를 하는 전장연 활동가에게 항의한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당시의 일에 사과를 하며 앞으로 전장연의 투쟁에 연대하겠다고 했다. 다른 한 시민은 유아차를 끌고 지하철을 탔을 때 큰 불편을 겪은 이야기를 하며 비장애인도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에 연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국회 앞과 광화문에서 시작하여 남태령, 안국역까지 이어진 연대의 물결은 우리 운동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각자의 부문에서,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싸우자. 퇴진을 넘어, 광화문 광장을 넘어 열릴 평등한 세상을 함께 꿈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JS
전환 회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대학생 활동가.
#4
다시 만난 세계, 새로 만들 세계
"서울이 무섭다니까 남태령에서부터 긴다"라는 속담이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 들어가려는 삼남의 촌놈이 서울 인심이 무서워 서울로 넘어가는 고개인 남태령에서부터 기어간다는 뜻이다. 지금이야 서울이 커져서 남태령 고개만 넘으면 서울이지만, 그 전엔 남태령에서 한양 도성까지도 한참이었으니 예로부터 서울 인심이 낭떠러지 같기로 소문이 났었나 보다. 조선 이래로 중앙 집권의 역사를 가져온 우리 사회에서, 서울은 단순한 지명이나 도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위압감을 가지고 성벽을 둘러치는 언어이다. 남태령은 그 서울과 서울 바깥을 나누는 여러 공간적 경계 중 한 곳이다. 남태령은 서울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인 것이다.
2024년 12월 21일 토요일, 삼남에서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진입하려던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은 그런 남태령에서 경찰에게 봉쇄당했다. 남태령은 거대한 '성벽'이 되었다. 경찰 버스로 가로막힌 도로에서 농민들은 고립됐다. 어쩌면 그 고립은 단지 이 시점에 남태령에 갇혀 있다는 의미 이상으로, 서울로 뭐든 집중시키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소외당하던 농민과 농촌 사회가, 더 나아가 지방이 고립된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 바깥의 농민들에게, 공깃밥 한 그릇 1,000원에 발이 묶인 농민들에게 그동안 누가 주목했는가. 필자는 우연한 기회로 호남 농촌 지역에서 태어나 성장하며 아득바득 공부해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 20대 여성과 자주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항상 서울 사람의 '대책 없는 천진함'에 분개했다. 서울 사람은 꼭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생활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울의 의식과 생활 양식에 익숙해 서울 밖의 그것에 무감한, 사소한 예시로 집주소를 말할 때 '**도'로 시작하는 타지인 앞에서 당연스럽게 '@@구'부터 주소를 부르는, 그런 사람이 바로 서울 사람이다.
아득바득 공부해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한 그를 포함해, 지방으로부터 끊임없이 사람과 자원을 빨아들이는 곳이 서울이다. 쌀을, 채소를, 육류를, 전기를, 공산품을. 뭐든 간에 지방의 희생으로 지탱되는 그 도시가 서울이다. 충남의 화력발전소에서 서울에서 소비할 전기를 만들다가 목이 잘려 사망한 김용균도, 평화시장 미싱공장에서 일하려 전국 각지에서 팔려 온 ‘공순이’도, 거제도 조선소에서 스스로 몸을 가둔 하청노동자도, 결혼 상대가 없다고 외국에서 '수입'된 농촌의 결혼이주여성도 모두 이 서울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서울 사람은 이들에게 무감했다. 서울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의식이고 공간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본 이번 남태령은 조금 달랐다. 서울과 지방을 가르던 장벽이 서울 사람과 바깥사람의 만남으로 열렸다. 여의도와 광화문이라는 서울을 상징하는 거점에서 집회를 열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서울의 경계인 남태령으로 향했다. 그들은 바깥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서울이란 성 안에서 억압받는 자신을 재발견했다. 남태령의 자유발언대에 선 젊은 여성들은 줄이어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을 밝혔다. 페미니즘의 목소리로 사회를 향해 외쳤다. 서울 사람들은 성적 지향을, 성별을, 나이를, 직업을, 본인을 사회적으로 제약하던 그 '굴레'를 스스로 밝혔다.
거꾸로 이들은 농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깃밥 가격이 1,000원을 넘어가는 데에 분개하던 서울 사람인 자신이 농촌을 억압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얼핏 깨달았을 것이다. 반대로 농민들도 그랬을 것이다. 도시를 지탱하기 위해 착취당하는 존재인 자신들이, 가부장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남태령은 국적은 같지만, 다른 세계에서 살던 존재들이 충돌하며 서로를 인지하는 계기의, 응원봉과 트랙터가 만나는 공간이었다.
남태령에 선 서울 사람은 서울이란 성을 지키던 국가폭력의 실물을 목격했다. 여의도와 광화문의 집회에서 시민들에게 주눅 들어 하던 경찰이 삼남의 농민들 앞에선 폭력적으로 변했다. 누군가 자유발언에서 "초·중등 시절 정의로운 경찰의 모습을 보며 경찰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 경찰이 그러하지 않은 모습을 보았다"라고 일갈했다. 사실 경찰은 예전부터 이랬다. 대추리에서, 쌍용차 공장에서, 백남기 농민이 죽던 그 현장에서 말이다. 새삼 여기서조차 서울 사람은 자신의 특권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서울 사람과 바깥사람이 본래 다른 사람이었던가? 천만 서울, 더 나아가 수도권 2,500만 인구의 가계도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절대다수가 지방의 농산어촌 출신이다. 응원봉을 들고 경찰에게 "차 빼라"라고 외치던 20대 여성들도 그러하다. 그렇기에 이번 만남의 장을 '다시 만난 세계'라고 명명하는 건, 집회 현장에서 대중이 목 놓아 부르던 노래 제목을 차용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이번 남태령을 전농의 정체성과 활동 이력을 가지고 깎아내리는 일각의 비판은 온당하지 못하다. 평소엔 반미·반일 자주 구호가 난무했을 법한 전농의 집회에서 여성 농민이 페미니즘을 말하고, 전농엔 관심도 없던 수도권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앞장서 경찰과 교섭해 서울로 향하는 길을 연 건 남태령에서 만난 대중의 힘이다. 광장의 정세는 (민중으로서의) 시민 대중이 주도하는 것이지, 특정 정파 세력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예시로써, 그동안 민주노총이 외치던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습니다!"라는 구호가 그동안 무시당하다가 이번 국면에서 회자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전농을 평가하는 것 역시 대중이어야 하는 것이다.
단절된 세계가 다시 만나는 때는 빛나고 벅찬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체를 진보라고 할 수 없다. 그 어느 때보다 상상력이 필요하다. 87체제의 수립 이후 새로운 사회, 세계를 구상하는 대중의 상상력은 급격히 약해졌다. 단순히 대중이 보수화했다는 뜻이 아니다. 87체제가 가진 민주적 정당성과 한 세대 이상을 관통하며 지나온 경로는 그 자체로도 엄청난 힘을 가진다. 16년 박근혜 퇴진 촛불과 이번 윤석열 퇴진 촛불 모두에서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고 외치는 학생들이 이를 시사한다. 87체제를 뛰어넘는 상상력이 없다면, 16년 촛불과 마찬가지로 이번 윤석열 퇴진 운동 역시 그 자체로는 '민주주의 수호'라는 구호에만 머무를 공산이 크다.
박근혜 탄핵 이후 세상이 딴판이 될 것처럼 흥분하던 이들을 기억한다. 실제 세상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 책임 있는 운동 세력과 정치 세력의 역할은 여기서 시작한다. 박근혜 탄핵 이후 제자리로 돌아간 세상이 결코 커다란 진보의 장이 아니었듯, 윤석열 탄핵 이후의 사회도 어쩌면 큰 변화는 없을 확률이 높다. 상상력이 필요하다. 정치와 운동은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은 이런 모습이라고 제시하고, 대중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 대안을 모색하고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진보는 일종의 비약이다. 기존 체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마를 타고 다니던 시절의 세계관에서 자동차는 상상할 수 없다. 결혼이 남녀와 가문 사이의 만남으로만 규정되는 세계관에서 동성혼은 상상할 수 없다. 윤석열 이후의 세계는, 박근혜 이후가 그랬든 "지켜진 민주공화국"에서 그쳐선 안 된다. 그동안 외면당한 상상을 실현하고, 새로운 상상이 발현하는 사회여야 한다.
서울 사람이 서울 바깥 일에 얼마나 무감했던가. 여기에서 서울은 물리적인 공간 서울, 행정구역 서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기실 의식의 영역이다. 우리가 먹는 식재료, 사용하는 공산품, 살고 있는 건물의 자재, 사용하는 전기 모두 서울 밖의 착취로부터 왔다. 서울 사람은 이를 몰랐다. 지방에 무감한 서울 사람은 서울 안의 착취와 차별에도 무감했다. 서울 안에도 지방이 있다. 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 노동자가 그렇고, 새벽 첫 차를 타고 출근하는 청소 노동자는 서울 사람의 눈에 들었는가? 반짝이는 서울 어딘가로 숨겨지는 홈리스가 그렇고, 시민의 발이라는 지하철을 타지 못하는 장애인이 그러했는가? 성소수자는 어떠한가? 여성은? 노인은? 어린이는?
남태령으로 달려간 응원봉이 전농뿐만이 아니라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에, 전태일 의료재단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함께 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태령에 선 '서울 사람'들은 억압받는 자신을 깨닫고, 더 나아가 억압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단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이제 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느끼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진보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권력은 이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를 서로 분리하고 고립시켰다. 80년 광주를 고립시켜 체제를 유지한 신군부와 같이. 그러나 80년 광주가 87년 그 바깥과 만나 전두환 군부독재를 무너트렸듯, 이번 남태령에서의 서울과 그 바깥의 만남은 세상을 다시 한번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김경일
서울 동대문구 주민이자 노동조합 활동가. 책임지는 정치와 운동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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