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남태령의 사람들, 연대의 기억들: 1부
12월 21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전봉준투쟁단의 남태령 트랙터 투쟁은 정체성을 교차한 우리 시대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밤을 새우고 날을 보내며 농민들과 함께 남태령 고개를 지킨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남태령 투쟁이 우리 운동에 남긴 것들을 되짚어 보자.
#1 남태령의 밤: 2024년의 우금치를 넘어선 우리들의 이야기 (최강희, 최상희)
#2 남태령, 우리가 서로에게 새겼던 권리의 이름 (이재현)
#1
남태령의 밤: 2024년의 우금치를 넘어선 우리들의 이야기
* 이 글은 남태령 투쟁의 현장을 교대로 지킨 최강희(세종)와 최상희(춘천)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최강희의 남태령: 가장 긴 밤을 시작하며
"오늘 남태령에 가려고 신발을 고르다가 경찰들이 가로막는다는 말에 방수화를 신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문득 백남기 어르신이 별이 된 이후 전농의 투쟁으로 물대포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죽은자는 산자를 온 힘으로 돕는다. 그리고 산자는 죽은자를 온 몸으로 기억한다." 트위터에 올라온 이 짧은 글은 우리가 왜 이 곳에 모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동짓날 밤, 가장 긴 밤이었다. 세종에서 달려온 나는 운동을 하다가 남태령 소식을 들었다. 농민들이 경찰에게 폭행당하고 연행되었다는 소식에 좌절감이 밀려왔다. 2015년 민중총궐기가 생각났다. 백남기 농민이 무기력하게 경찰의 폭력 앞에 쓰러져가는 모습이 생각났다. 2022년 이태원에서 경찰의 무관심 속에 죽어가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2014년 세월호도. 시간이 지남에도 변하지 않음에 구역질이 몰려왔다.
8년 전 양재IC에서 막힌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들을 기억한다. 28명이 연행되고 3명이 다쳤다. 광화문 집회에선 존경하는 시민을 운운하며 무기력으로 일관하던 경찰이, 양재IC의 농민들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때는 농민들을 위해 달려나간 시민들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2024년 남태령의 밤은 달랐다. 영하 7도의 한파 속에서도 시민들은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닭죽과 핫팩, 담요가 줄을 이었고, 추위를 피하라며 버스를 대절해 온 시민도 있었다. 어떤 이는 푸드트럭으로 어묵 500인분을 나누었고, 누군가는 보조배터리와, 또 다른 이는 따뜻한 커피를 들고 왔다.
"8년 전 농민들은 외로웠으나, 어젯밤 농민들은 시민들의 환대와 응원으로 추위와 고단함을 잊었을 것이다. 저 유연하고 밝고 씩씩한 젊은이들을 좀비 윤석열과 부패한 국힘당 적폐들이 무슨 수로 이길 것인가. 그놈들은 절대 못 이긴다. 승패는 결정났다."는 김혜형 농부의 말처럼, 이번에는 달랐다. 1
2024년의 남태령에서 눈에 띄는 것은 2030 여성들의 존재감이었다. 더 이상 그들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바로 약자 한없이 약하고 더 없이 힘 없는 진짜 약자, 세상을 바꾸는 건 항상 약자였다." 남태령의 밤은 이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농민의 딸, 젠더퀴어, 정신질환, 동덕여대 재학생 등 각자의 정체성을 먼저 밝히며 시작된 발언들은 한결같이 "이런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는가"를 이야기했다. 운동권의 관성에서 벗어나, 연대가 필요한 곳이라면 망설임 없이 달려나가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 시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농민들만 있었다면 다 연행되거나 더 심한 탄압이 있었을 것이라는 한 농민회 분의 발언처럼, 시민들의 존재는 경찰의 무리한 진압을 저지하는 방패가 되었다.
최상희의 남태령: 떨리는 마음으로 건너온 다리
춘천에서의 밤은 길고도 길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보며 한숨도 자지 못했다. 동생이 세종에서 달려가 지키고 있는 현장을 화면으로만 지켜봐야 하는 무력감, 그리고 끊임없이 올라오는 실시간 증언들에 가슴이 뭉클했다. 새벽 다섯 시, 더는 견딜 수 없어 춘천퀴어문화축제 동지들에게 연락했다. 한 명의 동지가 함께 가기로 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트랙터가 사당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늦게 왔다는 죄책감이 몰려왔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광경은 달랐다. 그곳에는 여전히 천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있었고, 끊임없이 나눔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가 소심해서 같이 가주는 사람이 없으면 뭘 되게 못하거든요. 근데 광장에 나와 보니까 그런 걱정은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일단 나오면 여기에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한 대학생의 발언처럼, 남태령은 서로를 보살피는 다정한 광장이 되었다. 사당역으로 이어지는 행진에서도 이 다정함은 계속됐다. 시민들은 계단이 나올 때마다 뒷사람을 위해 "계단 있어요"를 외쳤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함께 걸었다.
브라이언 헤어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적자생존이 실은 '적합한 종의 생존'을 의미하며, 그 적합함의 핵심이 다정함과 협력에 있다고 밝혔다. 남태령에서 우리는 이 진화생물학적 진실을 목격했다. 폭력도, 분노도, 적대도 없었다. 대신 우리는 서로를 보살피는 다정함으로 싸웠다. "근데 적어도 나는 계엄 당일날 같이 국회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 때문에 남태령에 갔던 거라서... 21일 밤부터 22일 새벽까지 남태령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계엄의 밤때 국회로 달려갔던 사람들의 용기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라는 누군가의 발언이 말하듯,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용기에 빚지고 있었고 그 빚을 또 다른 다정함으로 갚아나가고 있었다.
그 날 나는 한강이 시에서 읽었던 그 순간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선바위역에서 남태령역으로 향하는 전철에서 말이다.
전철 4호선,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 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 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 나는 고개를 든다. 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 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 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다.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맹렬하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가속도만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건너온 것일까?
13초간의 암흑. 그 순간은 마치 우리 시대의 축소판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둠을 건넜고, 그 너머에서 빛나는 광장을 만났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 앞에는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에 함께 질문하고 답할 광장이 펼쳐져 있다.
* 이 글에 인용된 현장 발언들은 전국농민총연맹 남태령 집회 참여자 발언 갈무리(김성우 녹취 및 정리, 2024.12.22)를 참고하였다.
최상희
현 정의당 강원도당 사무처장,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
최근까지 전환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지역운동, 지역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다.
최강희
세종시에 거주하는 전환 회원이자 정의당 당원.
#2
남태령, 우리가 서로에게 새겼던 권리의 이름
21일(토) 날이 저물 때만 해도 남태령에서 밤새 대치가 이어질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날은 급한 과제를 하느라 광화문 집회에도 나가지 않고 학교에서 밤을 샐 생각이었다. 당연히 집회에 필요한 방한 대비는 하지 않았고 응원봉도 챙기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학내에서 노학연대체(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비서공) 활동을 함께해온 회원들이 곳곳에서 남태령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경찰이 깃대 반입을 허용하지 않아 지하철역 모래함 뒤에 깃대를 숨겨놓고 겨우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렸다. 앞뒤가 공권력에 막혔다는데 언제 강제진압이 이루어질지 한 치 앞을 예상하기 어렵다는 분위기였다. 학생들 안전이 걱정됐고, 혹시나 모를 연행 가능성에 급하게 미리 과제를 제출하고 괜히 비장한 마음으로 새벽에 택시를 잡았다. 심야 무인 편의점에서 핫팩은 넉넉하게 챙긴 터였다.
택시에서 유튜브 생중계로 본 현장은 긴박하긴 했지만, 다른 한편 놀라운 활기가 눈에 띠었다. 평소 현실적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거대한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와 이를 바라보는 대중 사이의 넘기 어려운 벽을 집회들에서 종종 느끼곤 했고, 그래서 집회가 끝나면 관객의 자리를 넘어서는 정치가 가능한 걸까 하는 쓸쓸함에 빠지곤 했다. 그렇기에 사전에 조율이 없었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가능했을 다양한 참가자들의 자유 발언 열기에 무척 놀랐다. 과거 들었던 어떤 팟캐스트에서는 전공투와 도쿄대 투쟁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권위의 상징이었던 야스다 강당을 흙 묻은 농민의 발이 밟는 순간이 '해방강당'이었다고 말했다. 서울 도심의 거리를 트랙터는 밟지 못하게 하겠다는 공권력의 의지 앞에서, 저항하는 시민성은 경계를 넘는 다양한 모양의 발걸음으로서 트랙터 위에 급조된 연단을 밟고 있었다.
다양한 목소리의 연대는 단순히 의제들의 '섞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모순과 억압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서로를 규정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비서공)에서는 2023년 가자지구 집단학살이 본격화한 이후 늘 단위 깃발 아래에 팔레스타인 깃발을 함께 매달고 집회에 나서왔고, 팔레스타인 깃발이 함께 휘날리는 모습은 새벽에 도착한 남태령 고개에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탈식민과 반전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전 세계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절박한 호소와 불가분의 관계이듯, 한국 농민의 투쟁과 팔레스타인의 연대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발언들이 깃발들로 즐비한 하늘을 갈랐다. 팔레스타인 지역공동체의 생계와 문화를 지탱해온 올리브나무를 불태우고 토지와 수자원을 강탈하여 기업형 과수 농업 지대로 탈바꿈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정착식민주의는, 식량 생산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축출해온 지구적 현상의 극단이 아니던가. 트랙터 하나도 빚으로 얽매는 금융자본주의의 식민화가 종자 독점과 기술 '혁신'이란 이름으로 농민에게 비용을 전가해온 한국의 현실도 그 일환인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도시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해 오면서도 농민과 농촌에 대해 무관심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저학번 시기를 보냈고 지금은 나름 고학번인 세대지만, 그때 꽤나 흔했던 농촌연대활동(농활)에도 참여해본 경험이 없다. 학교에서의 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돌이켜 보면 무관심 때문이었다.
농(農)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된 건 올해 서울대생협 조리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밥상회에 '이야기숲' 먹거리운동가분들의 제안으로 참여하게 된 덕분이었다. 먹거리의 상호의존성을 기반으로 '식탁을 돌보는 이들의 식탁'을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노학연대와 먹거리운동을 잇기 위한 기획이었다. 여러 지역 여성 농민들의 생태농업 작물과 토착 종자 농산물로 지은 음식을 소개하던 먹거리운동가의 자부심이 인상 깊었다. 숨 가쁜 단체급식 업종에 종사하면서 건강권과 인력 충원을 요구해온 조리노동자분들이 정성 가득한 그 식탁 앞에서 지었던 환한 웃음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후 밥상회와 연계된 전시와 토크콘서트 등의 사업에 함께하며, 먹거리를 위해 다양한 자리에서 중층적인 억압에 맞서며 활동해온 여성 농민들의 얼굴과 목소리에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양곡관리법의 내용과 쟁점에 대해서, 그 한계와 함께 미온적인 법안마저도 거부하는 정부의 무도함에 대해서, 이를 넘어서는 농(農)의 체제전환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 즈음부터였다.
사실 그날 밤에 남태령에 모였던 많은 이들도 농(農)에 대해, 그리고 농민운동에 대해 평소에 잘 몰랐거나 무심했을 수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양한 의제와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언제나 유기적으로 조응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기에 갈라치기와 혐오는 때로는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며 그 균열을 파고들곤 한다. 사회과학서점의 책장 속 낡은 책들에서 공식처럼 등장하는 '노농동맹'의 '민중'이 결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거나 유지되지 않았다는 것은 20세기 세계의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었고, 국가와 자본은 생계를 위한 도시 노동자들의 물가 안정 요구를 핑계 삼아 농촌을 부차화하고 권력과 폭리를 취하며 책임을 회피하곤 한다. 도농과 세대 등에서 비롯되는 문화적인 차이, 그리고 거기서 자라난 다양한 위계와 차별이 연대를 가로막아온 이야기는 '운동권 후일담 소설'의 단골 소재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엇갈리는 목소리 사이를 끈질기게 가로지르며 대화를 걸어야 하고, 그런 부단한 마주침 속에서 만들어진 연결망은 광장에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태령에서 함께 밤을 지새운 모든 이들에게 그 새벽의 폭발적인 연결의 감각은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새겨지리라 믿는다.
해가 뜨고 잠시 눈을 붙이러 집으로 돌아가면서,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다들 체력적으로 소모되었을 텐데, 더 많은 이들이 아침에 모여들지 않으면 차벽을 뚫어낼 수도 공권력 투입을 사전에 막아낼 수도 없을 텐데 하는 걱정이 컸다. 추위에 떨며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현장 상황을 확인하느라 잠들었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다행히도 남태령에 모이는 응원봉은 많아져만 갔고, 단위 회원들도 재충전을 위해 퇴장한 야간 참가조를 대신해 깃발을 들고 삼삼오오 고갯길에 모였다. 새벽에도 땅을 일구는 육중한 트랙터가 '투쟁'을 내걸고 나아가는 모습에 '멋있다'는 원초적인 벅참에 휩싸였는데, 용산으로 마침내 나아가는 길을 직접 함께 걷지 못한 건 두고두고 아쉬울 일이다.
남태령에서 자리를 지켰던 이들, 그리고 대통령실 앞으로 함께 나아갔던 이들이 트랙터를 보고 느꼈던 벅참이 윤석열 탄핵 이후에도 잊히지 않길 바란다. 앞서서 길을 뚫었던 노동자들의 대오를 보며, 차벽을 뚫고 고개를 넘었던 트랙터의 행렬을 보며 '멋있다'고 느낀 만큼, 그들을 한 순간 민주주의의 '전위'로 추앙하는 데 멈추지 않길 바란다. 서로의 요구를 각인하며 만들었던 연결의 경험이 일상 속에서 새로운 정의를, 부단한 민주주의의 혁신과 재구축을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길 희망해 본다.
이재현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비서공)에서 노학연대 활동을 해 왔다.
노동자와 학생의 연대를 통해 상이한 위치와 입장의 주체들이
공통의 권리를 구성할 수 있길 바란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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