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환 집행위원장 정재환에게 묻는 2025년의 전환과 진보정치
유난히 길었던 2024년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 다사다난했던 2024년의 한국 사회와 진보정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다가올 2025년에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얼마 전 새롭게 전환 집행위원장을 맡게 된 정재환의 생각을 듣기 위해 전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얼마 전 사회운동·진보정치단체 전환의 신임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한 정재환(29)은 우선 젊다. 물리적인 젊음이 반드시 조직의 젊음을 담보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논하고 있음에도 정작 청년 활동가가 '집행위원장'이라는 큰 직책을 맡는다는 것이 기존 좌파 조직이나 운동권 조직에서 그리 흔한 일은 아니어 왔다. 서른 살의 젊은 전환 집행위원장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2025년의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 오랜만입니다.
별로 오랜만은 아니잖아요. (웃음)
- 뭐.. 우선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정재환이라고 합니다. 2013년 처음 진보정당에 입당을 했고, 중간에 당적은 바뀌었습니다만 현재는 정의당 당원입니다. 스스로를 '진보정치를 고민하는 활동가'로 정체화하고 있고요, 올해 11월부터는 사회운동·진보정치단체 전환의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 소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그간 당에서 주요 당직을 맡거나 전면에 나서지는 않으셨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정재환은 어떤 사람이지?'에 대한 질문을 먼저 좀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소년운동으로 활동을 시작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분들에게 본래 쓰시던 '검은빛'이라는 활동명으로 더 익숙하실 텐데요, 그간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네, 처음 사회운동을 접하게 된 계기가 청소년 인권운동이었어요. 2009년쯤 청소년 인권운동 단체인 아수나로에 처음 가입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중학생이었는데, 저희 학교는 소위 '대학 잘 보내는 중학교'로 유명하던 사립학교였고 그만큼 권위주의적이고 통제가 심한 학교였어요. 그 당시는 학생인권조례도 없었고 두발규제나 폭행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것이 굉장히 부당하게 여겨졌고, 이런 부분에 대해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단체로서 아수나로를 알게 되고 가입한 거죠. 사실 겨울쯤 아수나로 워크숍을 처음 갔을 때에는 '너무 운동권 같다'는 이질감을 느꼈어요(웃음). 그래서 처음에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는 않다가 2010년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를 갈 때쯤 활동에 결합하기 시작했죠.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운동이었어요. 당시 저는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는데, 좀 더 분위기가 자유롭다거나, 아무튼 괜찮은 조건의 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실패했죠. 앞으로 3년을 또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당시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이 시작되는 추세였어요. 그 운동에 결합하면서 매일 같이 아침에 가판대와 서명지를 들고 역과 공원, 행사들을 찾아다니며 지지하는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는 일을 했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내 삶에 와닿는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큰 효능감으로 다가왔고, 결국 자퇴하고 그 운동의 전업 활동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주민발의를 성사시키고 시의회 통과까지 이끌어낸 과정이 저에게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승리의 경험인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얼마 전 서울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당시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는데요, 학생인권조례의 폐지가 많은 활동가들에게 좌절을 남겼겠지만 저는 그럼에도 실제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낸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체벌이 폭력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남긴 것, 두발규제 폐지 등은 학생인권조례가 남긴 분명한 성과일 테고, 저 개인적으로는 당시 주민발의를 통해 많은 논쟁과 논란을 뚫어내고 시의원들을 움직이게 하는 과정들을 보며 사회적 변화를 만드는 방식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많이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청소년 인권운동은 지금도 저에게 사회변화나 운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의 하나의 기준입니다. 정파 운동이나 당 운동이 아니라 인권운동을 시작점으로 삼았던 것이 운동과 정치에 대한 지금의 감각을 다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이후 당 활동을 하게 된 것도 청소년 인권운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성공한 이후 개인적 관심사가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즉 선거권·피선거권·선거운동·정당가입 문제로 확장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보정당 운동과 연이 생기게 된 것 같네요. 본래는 녹색당이 처음 창당될 때 당원으로 가입했다가 나중에 진보신당으로 당적을 옮겼습니다. 당적 변경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는데, 가장 큰 계기가 되었던 건 제가 쭉 살았던 관악에서 진보신당 당협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보며 가장 작은 단위에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인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역에서부터 주민들의 삶에 밀접하게 맞닿아 있으면서 변화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진심을 느끼고 같이 해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후 진보신당이 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지역에서 처음으로 결합했던 선거운동이 당시 나경채 후보의 관악구의원 선거였어요. 원외정당 후보에다 2인 선거구였는데, 현역 구의원이었던 것을 감안해도 표가 굉장히 많이 나왔습니다. 선거 당일 개표참관인으로 개표소에 갔었는데 비록 선거에서는 졌지만 지역 유지가 "와 나경채 표 많이 받았다. 민주당으로 나왔으면 당선인데"라는 말을 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 정도의 소구력을 갖는 진보정치도 가능하구나, 우리가 원외정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보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진보정당 통합의 과정에서도 그런 고민들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진보정당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가 좀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지역에서 실제로 진보정치에 대해 기대를 거는 사람들의 변화의 희망을 좌절시키는 일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고, 그런 관점에서 진보정당이 단일 대오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으로 당시 진보결집(통합파, 이후 평등사회네트워크) 분들과 함께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통합 이후 정의당에서도 계속 정파에 속해 있는 활동가였고요. 2019년에는 당시 박예휘 부대표 밑에서 청년본부 부본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쉬운 것들도 많지만, 이렇게 보니까 꽤 다양한 활동을 해 온 것 같네요.
- 얼마 전 전환의 신임 집행위원장으로 인준되셨습니다. 방금 이야기에서도 나왔지만 기존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해 오신 나경채 현 정의당 기획실장님은 진보정당에서 아주 오랫동안 활동해 오신 'OB'에 가까운데요, 이번에 주요 정파 조직에 '30대 청년 집행위원장'이 선임된 것에 대해 전환 및 정의당 안팎에서 일정한 기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대론으로 읽힐까 우려스렵지만, 간단한 맥락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제가 아직까지 '윤석열 나이'로 20대인데요, 만 29살.. (웃음) 저는 지금이 진보정치의 한 세대가 변하고 있는 시점이라고 느껴져요. 제가 정의당에 입당한 계기였던 4자통합 당대회가 2015년에 있었는데, 통합 이후 정의당 안에서도 '곧 다음 세대의 시간이 온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모두가 그 시간을 가능성의 시간으로 느꼈고, 무거운 책임감이지만 또한 즐겁게 받아들이던 활동가들이 있었죠. 그러나 당시에도 그 시기가 위기의 시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물론 있었습니다. 노, 심으로 대변되는 진보정당이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그런 의문 속에서, 새로운 진보정치의 대표들을 발굴하자는 생각은 단순히 세대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 전반의 미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든 정파, 심지어는 모든 세대들이 이후의 주자들을 준비하고 있었죠.
그로부터 벌써 10년이 지난 지금은 이제 우리가 원치 않더라도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만큼 이 당의 골간을 이루던 중장년 활동가와 정치인들의 힘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다음 세대가 일정하게 준비되어 있어야만 했는데,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진보정치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불가피한 변화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나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네요.
그러나 위기 안에는 기회도 있을 겁니다. 지금 같은 불가피한 위기의 상황을, 동시에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진보정치의 주축이 되게끔 하는 변화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진보정당운동을) '두 번째 진보정당운동'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기존의 진보정당운동과 결별함과 동시에 그 정수를 이어야 하는 운동일 것입니다. 다만 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면면은 바뀔 수밖에 없을 텐데요, 이 시점에 새로운 활동가들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은 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집행위원장이 30대 초반의 활동가라 신선한 분들도 있겠지만, 그보다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기대감 자체도 있다고 느껴져요. 이것은 저뿐 아니라 당에서 활동하는 많은 청년 활동가들과 새로운 얼굴들 전반에 대한 기대라고도 생각합니다.
나름대로의 구분을 해 보자면, (우리 세대는) 진보정당운동에 있어서 새로운 기반을 갖고 있는 세대인 것 같습니다. 대체로 정파 운동이나 학생운동으로부터 운동을 시작한 사례들이 이전보다 훨씬 줄었죠. 특정 정파가 학생운동을 통해 대학생들을 조직하고 활동가로 이어내는 루트가 무너졌고, 그렇다 보니 이전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청년당원들이 실제로 더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설령 학교에서 운동을 통해 진보정당에 진입했더라도 그것이 이전 세대의 '정파 학생운동'은 아닌 경우가 많고요. 젊은 세대로 갈수록 사회운동, 즉 인권운동이나 대중운동의 영향을 받아 진보정당에 입문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주체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게 될 배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파에 대한 생각도 비슷한데요, 저는 정파가 기본적으로 '소속된 사회운동단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곧 저의 지향과 정체성을 설명하는 언어인 것이죠. 그래서 더더욱 정파에 대한 이야기를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 내에서 정파 활동을 마치 '이기적인 행동'처럼 규정하는 경향에 대해 동의가 안 되는 이유도, 하나의 조직이나 운동 안에도 집단화된 자기정체성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단순히 이기적이라 매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어서입니다. 숨김 없이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 오히려 정파에 대한 평가를 가능케 하고, 더욱 건전하게 활동할 수 있게 만드는 밑바탕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동안 정파정치가 당에 끼친 부정적 영향도 있었지만, 결국 정파를 하는 우리 스스로가 '그것은 건강한 정파 활동이 아니었다'는 구분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최근 전환은 2기 집행부를 출범하고 지역운동을 기반으로 한 진보정치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집행위원장이 되신 후 지역순회간담회를 다니시고 회원대회도 진행하셨는데요, 지역과 현장을 다니면서 보신 회원들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돌아다니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지난 진보정당운동의 기간이 너무 길었다, 요즘 말로 '턴을 길게 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운동의 굴곡이 사람들을 너무 지치게 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지역에 내려가면 민주노동당부터 시작해서 달려온 사람들을 많이 보곤 하는데, 이 분들의 낙담과 힘듦이 매우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20년을 돌아서 다시 원외정당이 되었다는 것의 무게가 우리 세대와는 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 와중에도 다시 한 번 무언가를 해 보자고 힘을 다지기도 하지만, 다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느낌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당연히 제가 만나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일 텐데요. 그런 사람들이 지금처럼 어려운 순간에도 다시 이렇게 모여 있다는 것에서 단단한 애정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지금 전혀 새로운 기로에 서 있는데 이 일을 누구와 어떻게 함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서로 평가를 할 시기라기보다는, 남아 있는 사람들과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해야만 하는 시점이라고도 생각하지만요.
꼭 전환 회원이 아니더라도 당의 주요 청년 활동가들, 당직자들도 자주 만나려 하는 중입니다. 이들이 가진 결기는 선배 세대와 또 다른 점인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청년 세대는 (지금의 상황을) 단순히 위기로 여기지만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낙관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진보정치가 아니면 안 된다고, 진보정당이 아니면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그런 힘이 유실되지 않도록 진보정당운동을 대하는 정파로서 전환의 태도나 활동가로서 저 자신의 태도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 조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집행위원장이 되시자마자 불법 계엄과 내란 사태라는 초유의 정국이 도래했습니다. 계엄령 선포를 보고 든 생각이나 느낌은 어떠셨나요?
우선 모두가 그랬듯이 깜짝 놀랐죠. 사실은 지금도 약간 현실감이 없습니다. 계엄 당일에는 집에서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이렇게까지 격동하는 시대였나 싶었고.. 박근혜 탄핵 때도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역사의 한복판을 걷고 있었던 것인데, 이번에도 내가 역사에 남을 한 페이지에 서 있구나 싶은 생각은 많이 들더라고요. 심지어는 윗세대 분들에게도 계엄이라고 하면 너무 오래 전 일이었으니까요.
-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에서 이변이 없다면 내년 초 조기 대선이 예상되는데요, 최근 있었던 총선에서 정의당은 원외로 전락하고 노동당과 녹색당 역시 부진했던 등 전반적으로 진보정치가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 속, 정치적 행위자로서 전환을 비롯한 독자적 진보정치 세력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런 중요한 정세 속에서 한 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이 정세의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시점이지만, 냉정하게 그 주체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죠. 지금은 한국 사회의 안정을 원하든 변화를 원하든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광장에 모여 있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이 간극이 다시 나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 우리 사회는 어디까지 변화해야만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시간이 우리의 시간이 아니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체제를 유지하는 힘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는 순간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때 변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다면 변화가 가능할 텐데, 요즘은 아직 그렇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조금 듭니다. 지난 총선 후 진보정치 세력이 위성정당에 참여한 정당들과 독자적 정당들로 구분되면서 다시 한 번 새롭게 (독자적) 진보정치의 영역을 만들어야만 하는 시점이 왔잖아요. 아주 많은 준비가 필요한 작업인데, 이런 시간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계엄과 탄핵이라는 급격한 국면이 도래했습니다. 이 국면을 사회변혁으로 이끌어 나갈 주체로서의 힘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을 아쉬워하기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저는 충분히 다음 조건이 올 것이라고 봅니다. 그 조건이 올 때를 대비해야 될 시기이고, 미약하게나마 그런 준비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의 참여 단위들이라거나, 현 민주노총 중앙의 정치방침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노동운동 내부의 여러 그룹들이 있을 것이고요. 정의당 내에서도 전환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준비가 너무 여유로워지면 안 되겠지만요(웃음).
- 그렇다면 집행위원장으로서 현재 전환의 정치방침과 향후의 주요 과제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면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새로운 정치세력화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 실천을 전제하고 있는 지향과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주역들이) 꼭 새로운 얼굴들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기존에 세상을 바꾸기 위해 조직되어 있는 사람들과 단체들을 새로운 목표지향으로 함께 정렬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의 가맹 단위들이 위성정당 사태를 불러온 종속적 사회운동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냈던 것은, 이제는 새로운 목표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회운동 내에서도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운동 내부적으로도 모종의 절박함에서 나오는 목표의식이 있다는 것인데, 사회운동의 그런 목표의식과 독자적 진보정당의 목표의식은 조금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충분히 합치될 수 있는 주장과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같은 결의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규합하는 일이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첫 번째 과제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새로운 정치세력화, 즉 새로운 얼굴들을 찾는 것도 병행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정의당의 지난 실험들도 그런 고민의 발로였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패했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청년-여성 국회의원 배출은 우리가 해야만 하는 실험이었고 진보정당운동이 새로운 지지층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하나의 전략이었습니다. 촛불 이후의 2017년 대선에서 청년 여성층이 대거 심상정을 지지했던 것은 성평등에 대한 그들의 열망이 심상정이라는 인물로 일정하게 모여진 것이죠. 진보정당이 여기에 너무 '경도되었다'라는 평가에 대해서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다만 이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장기적 계획이었어야만 했습니다.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을 전제하고, 이 새로운 진보정당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시민들의 정체성을 파악하여 이들을 우리의 지지층으로 포섭한다는 것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입니다.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질문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금의 세상에서 변화를 원하고 있지?"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흔히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를 바랄 거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죠.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들은 훨씬 디테일해져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이들은 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할까. 여성들의 경우에는 안전 문제, 성평등에 대한 요구가 가장 클 것이고,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또 다른 니즈가 있겠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조직해낼 수 있는 디테일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선거 때만 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이들과 함께 작더라도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연스럽게 세 번째로 넘어가면, 진보정당운동이 중앙정치에서 힘을 잃은 상황에서 이것을 실천하는 공간은 의지적으로도, 필연적으로도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속한 공간에서부터 변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변화의 상을 제시하고 지역 단위에서 다양한 실험을 해 나가야만 합니다. 지역으로 다시 내려가고 각 지역에서부터 독자적 진보정치, 사회운동 세력의 연합체를 만들어내자는 것이 지금 전환의 정치방침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 말씀하신 '새로운 얼굴들'과도 연결되는 질문입니다. 최근 세계 각국의 주요 진보좌파 운동에서는 청년·여성들이 그 최대 주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최근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도 역시 최다 참여 세대-젠더가 20대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이런 정세 속에서도 전환은 여전히 구세대 운동권 남성 위주의 조직이며 여성과 청년의 정치세력화에 미진해 왔다는 비판이 존재합니다. 다소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 지점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표면적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비판은 전환에 여성 회원이나 활동가가 매우 적다는 비판인데, 물론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오히려 그런 문제의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의 본질이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에게 전환이 별로 매력적인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라 생각해요. 여성뿐만 아니라 정치를 통한 변화를 고민하는 새로운 활동가들 전반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없다는 건데, 이는 단순히 여성친화적 조직이 아니라는 정도의 문제의식만으로는 해결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사회운동 내 젊은 세대 활동가들의 면면을 보면, 이들은 대체로 사회변화에 대해서 훨씬 긴 호흡의 일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전 세대 활동가들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혁명이 코 앞에 있는 것 같은 정세를 살기도 했죠.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의 성장, 다양한 사회적 격동을 겪은 활동가들이 '지금 이 순간 나의 헌신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헌신적으로 활동을 이어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우리의 동세대 활동가들은 그런 느낌으로 활동에 대해 접근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것이 좋다 혹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장기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 긴 싸움에 내가 밀알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죠. 그 기대를 가지고 나의 시간을 길게 보는 것이고, 어찌 보면 운동의 입장에서는 안정화된 세대가 온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운동에 대한 최고의 헌신이 아닙니다. 앞으로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여유로워야 하죠. 이제는 모든 조직과 모든 사회운동이 그런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운동은 즐겁고 유쾌해야 하지, 절박함만으로 이어지지 않고 절망과 분노만으로 동력이 생겨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번 윤석열 퇴진 운동의 과정에서 새로운 집회 문화들이 생겨났고 새로운 사람들이 사회운동에 유입되었는데, 누군가는 그것을 긍정하고 누군가는 비판하지만 저는 우리가 그것을 그냥 변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을 대하는 시대적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전환도 왜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이 우리 조직과 함께하지 않는지라는 본질적인 고민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만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운동이 즐겁고 유쾌해야 한다면 좀 더 재미있는 시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면에서 올해는 좀 더 다양한 시도들을 해 볼 계획입니다. 기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전환의 집행위원장으로서, 그리고 정재환이라는 활동가 개인으로서 다가오는 2025년 어떤 목표를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집행위원장으로서는 아무래도 전환이라는 조직의 안정화가 목표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2기 진보정당운동에 적합한 조직이 될 수 있도록 전환을 정비하는 것이 목표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지금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기보단, 지금 우리에게 있는 조직체를 새로운 상황에 맞게 정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활동가로서 개인적인 목표는.. 사실 지금이 개인적으로는 고민이 많은 시기인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지금 이 진보정당운동을 해야 하는가, 에 대한 물음을 다시 짚고 있는 시기입니다.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찾아가고,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조금 더 단단하게 다질 수 있는 2025년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분들을 만나고 또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
아마추어 디자이너 일도 가끔 한다.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만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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