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저항의 미술, 인간의 미술: 태동기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정부의 내란 시도 이후 많은 시민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헌법재판소 앞에서, 광화문에서, 남태령에서, 그리고 서울이 아니더라도 모두의 삶의 터전과 광장들 속에서 모여 목소리를 이어 왔다. 그간의 수많은 운동사는 물론이고 2024년의 집회까지도 다양한 현장에서 깃발과 그림들은 여전히 운동의 상징처럼 쓰여져 오고 있다. 해학스러운 깃발들도 역시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된 미술의 한 갈래이다. 미술은 때때로 본질을 감출 수도 있지만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저항할 때 역시 사용될 수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미술사 속 다양한 저항의 미술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저항의 미술, 시작: 19세기
19세기 이전까지 동서양 모두에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미술은 거의 없었다. 서양미술사에서 인본주의 등을 추구하며 사람을 더욱 실제에 가깝게 표현하기 시작한 것조차 15세기 르네상스로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것에서 당대 미술의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이전에 사회적 문제나 삶을 다루는 미술작품은 꺼려져 왔다. 정치적인 언급을 담고 있는 미술작품들은 벽에 걸어놓기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에도 여전히 예술은 저항과 고발을 만들어 냈다.
국민국가와 근대가 도래한 19세기, 폭력성이 가장 극에 달했던 사건이자 권력자들의 억압의 상징은 바로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전쟁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며 전쟁이 지닌 폭력성을 고발하고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증언하는 저항적 소명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은 몽클로아에서 나폴레옹 군대에 저항한 도스 데 마요 봉기의 주도자들을 프랑스 군대가 처형하고 있는 장면에 대한 기록이다. 해당 그림은 기존 미술사조를 깨 버리고 사회고발적, 저항적 성격을 가진 최초의 그림 중 하나로 묘사된다. 그의 등장 이전 절대다수의 미술은 기독교 미술이었으며 전쟁과 혁명조차도 신비화되어 그려져 왔다. 고야는 극적인 명암의 대비와 인물상의 대비로 꾸밈없이 잔인한 참상을 담아내며 전쟁과 학살을 숭상스러운 것이 아닌 잔인한 것으로 그렸다. 군인들의 모습에서는 기계처럼 가지런한 총구들만을 강조하는 한편, 절규하는 이들에게는 불안, 공포, 번민 등을 그려넣으며 참혹한 대비를 극명히 보여 주었다. 1
고야의 이와 같은 저항적 미술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것이 아닌 그가 그림을 그려 오며 쌓아 온 계몽적 저항정신에서 기원한다.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를 그리기 전인 1799년 발표된 그의 판화 연작 <로스 카프리초스>는 시사성이 높은 주제만을 다루었으며 주로 교회 권력, 국가 권력, 빈부격차, 광기 등에 집중하여 묘사했다. 특히 <구원은 없다>에는 마녀로 몰려 사냥당한 여성을 그려넣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수치를 주려 한다"며 마녀사냥의 피해자를 애석하게 그리고 미신에 사로잡힌 사회상을 고발했으며, <당신은 할 수 없다> 에서는 농민들의 등 뒤에 당시의 부유층과 권력자들을 상징하는 당나귀를 그려넣으며 빈부격차와 권력자의 허영심 등을 비판했다.
고야 등이 시작한 저항, 사회고발, 풍자의 미술들은 곧 1800년대의 사조로 이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로 오노레 도미에가 있다. 오노레 도미에는 화가 본인부터 궁핍한 생활을 하며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해 사회의 부조리를 그리는 거리의 화가가 된 인물이다. 도미에는 7월 혁명 이후 국왕과 부르주아지들을 비판하는 그림들을 적극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대표작 <가르강튀아>에서 당대의 왕 루이-필리프를 16세기 소설의 주인공에 빗대어 그려넣으며 탐욕스러운 착취의 대상으로 묘사한 것이 유명하다. 도미에는 이와 같은 신랄한 그림으로 인해 국왕모독죄를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현 시대로 치자면 그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오른 민중예술가이자 거리의 활동가였다. 수감 생활을 끝낸 도미에는 더더욱 신랄한 풍자를 하며 한편으로는 본인과 같은 가난한 민중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삼등열차>에서 도미에는 당시의 사회상에서 소외당한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한다. 겨우 잠든 아기를 보듬는 여성, 손을 모으고 허공을 응시하는 노년 여성, 쓰러지듯 잠을 자고 있는 소년 등을 보여주며 산업화 그늘에 가려진 도시 빈민 노동자들을 보여주며 소외된 여성들을 그리고 따뜻하게 담고자 했다. 도미에 이후에도 18~19세기의 그림에서 '가르강튀아'는 지배계급의 탐욕을 풍자하는 도상으로 활용된다. 특히 프랑스 등지에서는 이와 같은 풍자와 저항, 고발적 성격을 띠는 미술들이 늘어난다. 도미에의 <가르강튀아> 이후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서 소외받은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을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기성 지배집단의 유착, 혁명 이후 달라질 것 없는 삶 등을 그려넣으며 '사회대전환'을 꿈꾸는 그림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2
이와 같은 점에서 도미에의 <1831년 5월, 7월의 영웅>은 당대의 가장 상징적인 그림이다. 도미에는 그림에서 7월 혁명에 가담해 새 정부를 도래케 했으나 나아진 것 없는 삶에 낙담해 자살을 시도하는 남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7월 혁명 당시 국가보상위원회가 작성한 자료의 부상자와 사상자 명단에 장인과 도시 노동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당시 그들이 비판의식을 가지고 혁명의 주체로서 앞장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림은 이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과, 7월 혁명을 통해 제한 선거제로 선거권을 얻은 부르주아지와 7월 왕정의 결탁에 대한 실망과 고발을 보여 준다. 3
한국 저항미술의 태동, 1980년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격랑의 역사 한가운데에 있던 한국 역시 민중미술의 태동기였다. 김지하, 박노해, 김수영, 김민기 등 문학계와 연극계 등지에서도 일었던 민중예술의 한 갈래로서, 민중미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영향을 받으며 저항의 미술로서 다루어졌다. 민중미술에서는 이전 한국의 현대미술 사조와는 구별되게 민중의 삶과 저항정신을 그림에 담고자 한 것이 보여진다.
1세대 민중미술가인 오윤(1946~1986), 신학철(1943~) 등 많은 민중미술가들과 최민(1944~2018), 성완경(1944~2022) 등 미술평론가들은 자본주의 및 권위주의 독재정치와 대항하고 미술의 효용성을 소통의 미술과 고발의 미술로 확장하려 노력했다. 오윤의 작품 <칼노래>는 동학의 교주 최제우의 가사를 그려낸 것으로, 결단의 시기에 나서자는 최제우의 가사를 그려내며 저항의 정신을 담으려 했다. 전투적인 춤사위와 역동적인 찰나의 틈을 목판의 거친 화풍과 강렬한 색 대비로 그려낸 이 그림은 오윤을 상징하는 그림 중 하나로 기억된다.
민중 판화가로 알려진 오윤은 1980년대의 암울했던 삶을 목판화로 풀어내는 작가였는데, 미술평론가 고충환은 이와 같은 오윤의 그림들을 "이념성과 도덕성이 강한 힘의 정서를 표출시킨 그의 목판화는 시대정신의 표출로 나타난다"며 그의 그림을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정서를 지닌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여공의 수기>와 같은 작품들은 자본주의와 노동 착취 속에서 바스라진 여공들의 모습을 그려넣으며 이를 고발했으며, <마케팅-지옥도> 연작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분배의 몫에서 제외된 민중에게 속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4
198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의 민중미술은 참여형 미술, 걸개그림의 형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는 산업 사회의 일상을 기록하며 삶을 고발하던 형태의 1세대 민중미술이 참여를 강조하며 선전선동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2세대 민중미술로 분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 최병수(1960~), 김인순(1941~), 윤석남(1939~), 김봉준(1954~) 등은 소통형 미술을 주도했는데, 김봉준, 장진영 등이 만든 미술 동인 '두렁'은 이와 같은 민중미술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 시기 '두렁'을 시작으로 '서울미술공동체', '둥지', '엉겅퀴', '시각매체연구소' 등 소위 미술운동집단들은 일종의 노래패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행동주의와 결합하여 미술교육과 현장연대, 걸개그림 제작 등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최병수 외 35인의 <노동해방도>는 이와 같은 걸개그림의 참여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동해방도>는 가로길이 2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걸개그림인데, 이 시기의 걸개그림들은 민중참여형 미술로서 선전용으로 거대하게 제작되었으며 여러 사람이 함께 제작했다. 노동해방도는 학생, 시민, 화가 35인과 함께 그려진 것으로 유명하다.
더욱이 2세대 민중미술은 여성미술의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1986년 여성미술가 윤석남, 김인순, 김진숙 등은 '시월모임-반에서 하나로'를 주최하며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 전시를 이끌었다. 그림패 '둥지'가 그린 <맥스테크 민주노조>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여성미술연구회 등을 중심으로 하는 페미니즘 미술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맥스테크 민주노조>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과정에서 그려진 그림으로 해외 자본 기업들의 위장폐업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던 여성 노동자들을 그려넣었다.
여기, 저항미술이 서 있다
저항미술, 민중미술은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보다 흔히 함께해 왔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 상징이자 6월 민중항쟁을 상징하는 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도 두렁의 걸개그림에서 출발하는 양식의 저항미술이다. 최병수는 당시 민주열사 이한열이 이종창에게 부축되는 장면의 사진을 판화로 그렸는데, 이를 이한열이 소속되어 있던 연세대학교 ‘만화사랑’의 동아리 회원들이 함께 걸개그림으로 다시 그려낸 것이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6월 항쟁의 비극을 담으며 민중미술을 변혁의 상징이자 저항의 기수로 만든 작품으로, 광장의 미술, 저항의 미술로서 민중미술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많은 예술가들은 서로를 외면하는 미술이 아닌 서로를 보듬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기득권과 싸우는 미술을 위해 노력했다. 서양의 19세기와 한국의 1980년대는 이와 같은 고민이 깊게 보여지는 시대로, 더 이상 미술이 '교양'이라는 명목 하에서만 숨어 있고 '그들만의 리그'로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제 옆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담론은 역사적으로 그리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김홍도, 윤두서, 박수근 등이 항상 그려넣었던 사람들의 평범한 삶에 대한 묘사가, 시대적 상황과 만나 고발과 저항의 수단으로 어느 순간 우리의 옆에 서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저항의 미술의 태동은 예술계가 더 많은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며 민중에게 다가가게끔 하는 핵심적 도구가 되었다. (계속)
이미래
고고·미술사학도. 미술, 문화, 역사 속에 흘러간 삶들을 보고자 한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불확실한 낙관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더 나은 길을 고민한다고 믿는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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