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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뉴라이트, 왜곡자들이 원하는 것: 한-일 예술사를 돌아보며

by Domoleft 2024. 11. 1.

[문화] 뉴라이트, 왜곡자들이 원하는 것: 한-일 예술사를 돌아보며

이른바 '뉴라이트 사관'이 곳곳에서 논란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의 말처럼 '역사의 우월성'이란 존재하는가? 한-일의 예술사를 함께 돌아보며 역사왜곡의 목적의식을 한 꺼풀 벗겨 보자.


칠지도와 임나일본부설의 태동

칠지도

 

1873년, 일본 신궁의 주지이자 역사가 간 마사스케(菅政友)는 여섯 개의 나뭇가지가 달린 검, 육차도의 녹을 벗겨내고 그 안에 새겨진 금상감 기법으로 적힌 명문을 발견했다. 명문에는 '칠지도'라 적혀 있었고, 그렇게 육차도는 일본의 국보, ‘칠지도(七支刀)’가 되었다. 이후 일본 학계는 칠지도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을 이어 갔다. 이 칠지도에 적힌 명문은 "태화 4년,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왜왕 지(旨)를 위해 칠지도를 만들었으며, 이를 후(侯)왕에게 줄 만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근거로 일부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 남부지방을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칠지도를 주장했다. 백제가 일본에게 이를 '조공'했다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백제가 동진의 것을 일본에게 '전달'했다는 설도 나왔다. 이 '칠지도 논쟁'은 북한 학자 김석형과 남한 학자 이병도가 일본서기 기록이 아닌 칠지도의 명문에 의거해 해석해야 한다며 반박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일본 학계의 주장이 출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서기>에는 “왜국이 신라를 쳐서 가야를 평정했고, 침미다례를 함락하여 백제에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제가 이에 기뻐하여 왜왕에게 칠지도와 칠자경 등 여러 보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분명 <일본서기>는 완전히 오류로만 덮여 있는 위서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기록은 의도적인 오류와 조작이 많다. 신화적 요소들로부터 명백히 고고학적 증거가 나와있는 것들이 조작되어 있으며 이주갑인상 등 2갑자(120년) 가량을 끌어올려 일부 역사가 사라지거나 시대가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즉,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체계적으로 연도를 조작했을 정도로 일본서기의 고대사 부분 신뢰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이 오류들은 일본의 일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임나일본부설'의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해 다뤄지는 일본 학계의 논문이나 주장들 중에는 심심치 않게 임나일본부설 등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임나일본부설 등을 주장하는 일본 학계의 사조는 한국의 뉴라이트 역시 답습하고 있는데, 이들은 심지어 스스로 일본 학계가 아님에도 식민지가 한반도를 근대화했다고 주장하거나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동의하는 등 정치적 입장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펼쳐나간다.


한반도의 조공이 맞는가

이들의 목적은 후술하기로 하고, 먼저 미술사에 있어 한반도 국가가 일본에게 ‘조공’하는 위치이며 일본의 영향을 ‘받은’ 위치라는 것은 사실일까? 칠지도 논쟁은 분명히 현재에는 다소 잠잠해졌으나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는 주제이다. 명문 해석부터 그 주제가 갈리는 주제이기에 이를 명확히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분명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호 교류가 활발했다. 따라서 고대사에서도 한국이 일본에 영향을 준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일본 고훈 시대의 토기인 ‘스에키(須惠器)’는 한국 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된다. 스에키는 고훈 시대 일본이 야요이 토기의 전통 기법이 아닌 새로운 기법을 전수받아 토기 가마에서 환원염 소성을 이용해 완성시킨 토질토기다.

좌측: 가야토기 / 우측: 스에키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에도 동한직(야마토노아야노아타히,倭漢直) 등 안라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도래인 직공 등이 등장하는데, 일반적으로 백제나 가야에서 대규모 도공집단들이 도래한 것으로 추정하며 이들이 스에키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기종과 형식에서도 스에키와 가야토기는 매우 비슷하다.[각주:1]

 

일본 불교 전파에서도 한반도 국가의 영향이 있다. 일본의 아스카 문화를 이끌었던 쇼토쿠 태자와 연관이 깊은 소가씨 가문 역시 부상략기에서는 “아스카데라 목탑 초석에 사리를 안치할 때 소가노 우마코를 필두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나오며, 일본의 불교 도입에서도 마한-백제계 도래인이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각주:2] <일본서기>에서는 쇼토쿠태자의 스승 혜자를 고구려의 사람으로 소개하거나, 588년 백제의 위덕왕이 불사리와 함께 혜총을 비롯한 여섯 명의 승려와 노반박사, 와박사, 화공 등을 보내 사찰 건립을 도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시계방향으로 청동석가여래좌상 / 연가7년명금동삼존불입상 /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 아스카데라 청동석가여래좌상

 

실제로 이 당시 건립된 아스카데라의 청동석가여래좌상은 본래 부처를 가운데에 두는 일광삼존불 양식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신묘명금동삼존불입상 등 한반도에서 다소 앞 시기인 6세기 중기 무렵부터 유행한 양식이다. 이는 고구려의 불상인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과 많이 닮아 있는데, 실제로 이는 백제계 혹은 고구려계로 추정되는 안작조(鞍作鳥(쿠라츠쿠리노도리, 鞍作止利))가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이 한반도 국가의 영향을 받은 안작조의 양식은 호류지 금당석가삼존상 등 그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은 물론, 향후 일본 미술 전체에 적용되며 도리파(止利派)를 형성해 쥬구지 절 반가사유상 등 여러 부분에서 적용되었다.

좌측: 안견의 <사시팔경도 - 만춘> / 우측: 슈우분의 <죽재독서도>

 

조선시대에도 역시 조선 초기 회화가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화풍에 영향을 미친 것을 주목할 만 하다. 이는 일본 미술계에서도 연구되고 있는 주제로, 일본의 선승화가 슈우분(周文) 등을 통해 조선의 미술이 전해졌다는 설이다. 슈우분은 일본 수묵화의 개조로 불리우는 인물로,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죽재독서도>는 조선 전기 화가 안견의 <사시팔경도  만춘>과 유사하다. 한 쪽 중반부로 치우친 편파구도, 확대지향적인 공간개념 등과 함께 슈우분파의 가쿠오(岳翁)도 안견파의 화풍을 가지고 있는 등 분명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각주:3] 슈우분은 1423년 일본 사신단의 일원으로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듬해 돌아갔다.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슈우분이 안견파와 남송 마하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예술에 우월성은 없다

이렇듯 한반도와 일본의 예술사는 오랜 기간 서로 연결되어 왔으며, 특히 한반도가 일본에게 영향을 끼쳤음은 사료적이나 미술사학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반도가 일본에 영향을 주었으니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자"거나 "한국 미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예술에 우열을 가리고 차등을 두는 태도는 매우 위험한 태도이다. 일례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 고려 불상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한국 미술사에서 수치처럼 다루어져 왔다. 세키노 다다시는 균형미가 떨어진다며 고려 불상을 혹평했으며, 한국 미술사학의 개척자라고도 불리는 삼불 김원용 선생은 심지어는 “한국 최악의 졸작”[각주:4]이라는 평까지 남겼다. 그러나 최근 고려 불상에 대한 재조사와 재검토가 일어나며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위적 불상이라는 평가와 함께 2018년 2월 8일, 국보 제323호로 등재되었다. 이는 예술에 대한 평가가 항상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 준다. 우열의 절대 기준이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예술에 차등을 두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며, 그 차등은 결국 차별주의자들이 바라는 길일 것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실제로도 일본 미술이 한반도 국가에게 오히려 영향을 주었던 점이나 독창적인 면모 역시 당연히 존재했다. 특히 일본 미술은 한국 미술의 미싱 링크(Missing link)들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미술사의 가장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것들이 사라져 있다는 점이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로, 수많은 전란과 격동을 겪었던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절 본당에 위치한 불상이나 회화 등이 여전히 남아 있는 나라는 이제 일본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제 황룡사와 미륵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호류지를 보며 우리는 그 공간을 상상해낼 수 있고, 일본 회화의 발전 도상에서 일어난 한국과의 교류들을 보며 한국 회화의 발전 과정들을 채워넣을 수 있다. 즉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한일의 상호 영향은 예술을 그리는 통로이자 미싱 링크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일본 미술이 더 우월한가, 한국 미술이 더 우월한가와 같은 주제가 아니라, 왜 그들이 분명히 존재했던 한반도의 영향을 없애려고 하는가에 있다. 일본 사학계 일부와 뉴라이트의 목적에는 차등에서부터 비롯되는 멸시가 존재한다. 구 피식민국가의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스스로의 역사적 연결성을 부정하는 것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다. 뉴라이트 학자들은 오늘날의 한국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조선의 저급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일본의 훌륭한 '법치주의와 협력적 기업문화'가 제대로 자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비판한다. 스스로를 '친일파가 아닌 신우파(뉴라이트)'라 지칭하는 이들은 때문에 저급했던 조선을 식민지 일본이 ‘근대화’를 시켜준 것이라 주장하고,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로 쌍방의 역사 중 일방의 영향만을 남겨 놓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

뉴라이트와 일본 학계의 의도에 거대 양당이 빨려들어가며 역사 논쟁의 격론이 일다 보니, 일부에서는 이를 불필요하거나 지루한 잡음으로 여기기도 한다. 실제로 모든 이슈가 뉴라이트와 역사 전쟁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은 결코 좋지 못한 일이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참상과 불평등, 격차, 성범죄 등 현안과 의제들에 대해서는 내버려둔 채 '대일 굴종외교와 뉴라이트 심판'에만 몰두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나중에’를 외치며 입을 틀어막는 이들이, 다른 문제나 현안은 또 다시 뒤로 미루고 단지 ‘뉴라이트 심판’만을 내세우는 것에는 정치적 반대세력의 파산 외 다른 목적이 없다. 더욱이 뉴라이트 사관에 대한 반대조차 제대로 된 고찰이 아니라 ‘국권찬탈’ 등의 선정적 구호를 내세우며 피상적이고 정치적인 반대만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보좌파의 입장에서, 왜 여전히 뉴라이트와 역사왜곡에 대해 비판적으로 봐야 할까?

 

우리는 예술과 역사를 말 그대로 학문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술과 역사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구조와 권력 관계의 맥락에서 분석해야 한다. 그들의 목적성은 결국 불평등을 고취시키고 이면에 있는 피해자와 과정들을 지우는 것에 있다. ‘식민지 근대화’, ‘이승만’을 앞세우며 부도덕한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피해 입은 사람들을 열등하거나 부당한 존재로 만드는 것에 있다. ‘식민지배’와 ‘독재정권’의 이면에는 당연하게도 학살과 전쟁범죄가 존재한다. 과거의 사건들을 단순히 시간 순으로 이해하며 분노하는 것과 과거에 죽어간 사람들이 어째서 죽어야 했는지, 그들이 얼마나 죽어나갔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식민지배와 독재정권이 죽이고 앗아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다.

미술비평가 존 버거(John Peter Berger). 출처: 위키피디아

 

뉴라이트와 왜곡 세력이 필사적으로 무시하고자 하는 역사의 동력은 제국이 만들어내는 ‘근대화’도 독재가 만들어내는 ‘자유민주주의’도 아니다. 예술을 이끌고, 역사를 만들었던 동력은 그들이 그렇게 가리고 싶어하는 그 날 일본으로 건너가는 배에 타고 있던 도래인들, 그 시대의 조선을 그려넣었던 한국과 일본의 화가들, 식민지배와 독재 속에서 싸워갔던 이들과 죽어갔던 이들에게 있었다. 결국 과거사에 대한 왜곡과 한반도를 지우는 것은 단순히 국가적 참상이라는 거시적 사건만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불평등을 만들고 역사에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지워나갈 것이다. 섬세하게 악의적인 저들의 의도를 볼 때는 우리 역시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고,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의 의도대로 방치된 역사는 결국 불평등을 인정하게끔 하고, 사람들을 지우고 과거와 우리의 연결을 끊을 수 있다.

 

미술비평가 존 버거(John Peter Berger)는 "보는 행위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한다"며, 과거 미술이나 역사에 대한 대상화를 통해 명백한 것들을 가리고 왜곡하는 것은 "특권을 지닌 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역사를 새로 꾸며내려 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단순히 ‘한반도의 민족성 고취와 뉴라이트 척결’이라는 정치적 관념을 넘어, 역사와 예술을 바라볼 때 방해나 왜곡, 대상화를 걷어내고 바라보지 않으면 일본과의 역사적 관계 속에서 사라져 간 사람들의 존재와 의미를 제대로 보기란 어려울 것이다.


이미래

고고·미술사학도. 미술, 문화, 역사 속에 흘러간 삶들을 보고자 한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불확실한 낙관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더 나은 길을 고민한다고 믿는다.


각주

  1. 남익희.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도야마(堂山) 1호분출토 스에키(須惠器)의 계보와 제작배경." 한국고고학보 96.- ,2015, pp.140-159. [본문으로]
  2. 박해현. “일본 고대 불교 발전에 기여한 백제 渡來人”. 한국고대사연구, 2016, pp. 335-375. [본문으로]
  3. 脇本十九郞日本水墨畵壇ぼせる朝鮮畵影響美術硏究 28, 1934, pp. 159167 [본문으로]
  4. 김원룡, 한국미의 탐구, 1978, 열화당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