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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치 일반

되살아난 망령: 극우 폭력단체의 어제와 오늘

by Domoleft 2025. 1. 13.

[정치] 되살아난 망령: 극우 폭력단체의 어제와 오늘

이른바 '백골단'을 자처하며 국회에 선 극우주의자들의 당당함은 수많은 시민들에게 분노와 충격을 안겼다. 과거 한국 사회를 뒤덮었던 극우 폭력단체의 망령을 돌아보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백색테러의 현황을 살펴본다.


계엄이 불러낸 극우 테러리즘의 망령

'반공청년단' 및 '백골단'을 자칭하는 단체의 국회 기자회견을 바라보는 국민의힘 김민전 의원. 출처: MBC

 

12월 3일 이전에는 그 누구도 뉴스에서 듣게 될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던 '계엄'이라는 단어에 이어, 이제는 '백골단'까지 한국 사회에 돌아오려 하고 있다. 지난 1월 9일 과거 일본의 '전공투'를 연상시키는 흰 하이바를 갖춰 쓴 일군의 청년들이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실에 섰다. 국민의힘 김민전 의원실의 협조로 국회 기자회견을 진행한 이 단체는 스스로 '반공청년단'과 그 예하 조직인 '백골단'임을 자처하며, 자신들이 '민주노총의 대통령 불법 체포 시도'를 막고자 조직된 자경단임을 밝혔다.[각주:1]

 

이들이 자처하는 백골단은 이승만 정권기의 정치깡패였음과 동시에, 1980~90년대 시민들이 경찰 사복체포조를 지칭했던 이름이다. 역사적으로 백골단이라는 이름의 조직은 항상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을 최전선에서 파괴하는 상징적 존재로 기능해 왔다. 또한 이들이 백골단의 상위 조직이라 밝힌 '반공청년단'의 이름은 과거 이승만 정권이 조직하고 이용했던 관변 우익 테러단체인 '서북청년단' 또는 '대한청년단'의 이름으로부터 따 왔을 가능성이 높다. 불법 계엄과 내란 시도를 정당화하고 반공주의에 입각해 시위대에게 사적제재를 가하는 극우 폭력·테러단체의 부활이, 민주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무려 여당 국회의원의 공식적 협조를 통해 당당하게 선언된 것이다.

 

민주화 이후 사반세기, 반민주 독재 전위대의 이름을 2025년 지금 다시 소환한 이들의 행위는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역사적으로 이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광복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이어진 독재정권들은 반공주의를 국시로 하며 극우 파시스트 자경단의 결성을 국가 단위로 지원하거나 묵인해 왔고, 그 조직 형태 역시 관변단체 및 자경단에서부터 경찰 산하 공조직의 비칭(卑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갖춰 왔다.


백색테러, 대한민국의 시작을 뒤덮다

해방정국 당시 반소련 시위를 주도하는 서북청년단.

 

한국 사회 극우 폭력단체의 역사적 맥락은 헌정 체제의 시작인 1공화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광복 이래 역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극우 성향의 폭력단체는 1946년 결성된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혹은 서북청년회이다.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 주로 평안도 지역에서 월남한 인원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은 기독교 신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극우 개신교에 기반한 반공주의를 이념으로 삼아 이승만 정권의 전위대를 자처했다. 당시 미군정은 이들에 대해 "마치 나치와 KKK를 합친 것 같다"[각주:2]는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들의 사적 제재, 백색테러(우익에 의해 자행되는 테러) 활동을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이승만은 6,500명의 서북청년단 단원들을 국군에 받아들였으며 1,700명은 경찰에 합류시켰다.[각주:3] 이들은 좌익 활동가들뿐 아니라 반이승만 성향의 정치인, 시민들 및 그 가족들에게까지 무분별한 암살, 폭력, 학살을 자행했다. 해방정국~제1공화국 당시 있었던 보도연맹 학살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서북청년단이 저지른 수많은 학살 중에서도 최대 규모의 학살은 1948년 제주 4.3 항쟁에 대한 진압이었다. 서북청년단 인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군경토벌대는 실제 좌익 여부에 관계없이 토벌 과정에서 지나치는 모든 마을에서 홀로코스트 혹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이 떠오르는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해방정국 정치테러의 최대 주도자였던 서북청년단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의 우익단체 통합 속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편입된다. 이들의 다수는 이후 한국전쟁 과정에서도 국군에 편입되어 민간인 학살을 주도하거나 참여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4.3 항쟁 당시 좌익 분자로 지목되어 수감되고 있는 제주도민들.

 

그 시작부터 반공주의와 백색테러로 뒤덮인 제1공화국에서, 일명 '정치깡패'로 불린 극우 폭력단체들은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현재 우익 청년단체가 자칭하고 있는 '백골단'이라는 이름의 시초도 이 당시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총선에서 참패한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우익 폭력조직을 동원한 관제데모를 조직한다. 백골단은 이 당시 관제데모를 주도한 정치깡패 집단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도중인 1952년 발췌 개헌을 이끌어내어 직선제를 통한 이승만의 대통령직 유지에 기여했다.

 

이어 1958년 진보당 사건을 통해 혁신계 조봉암을 숙청한 이승만은 1960년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영구집권을 이어가기 위해 선거용 전위대인 '대한반공청년단'을 1959년 1월 창단한다. 자유당과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대한반공청년단은 서북청년단-대한청년단-백골단 등으로 이어지는 우익 폭력-정치단체의 계보를 그대로 따른 조직이었다.

 

제1공화국의 마지막 우익 폭력단체였던 이들의 활동 기간은 길지 않았으나, 그 잔혹성은 여전했다. 대한반공청년단 단원들은 3.15 부정선거 직전인 1960년 3월 9일-10일 양일 간 전라남도에서 민주당 간부들을 구타하여 치사에 이르게 하였으며[각주:4], 당시 통계에 의하면 백색테러의 사상자는 56명에 달했다. 이러한 우익 테러단체 및 정치깡패들은 4.19 혁명과 이후 5.16 쿠데타를 거치며 일부가 체포되거나 활동을 중지하였으나, 다수는 새로운 정권에 밀착하거나 경찰 조직에 흡수되는 방식으로 사실상의 명맥을 이어갔다. 1980년대까지 극성을 부렸던 주요 조직폭력배들의 다수도 해방정국의 우익 폭력단체들과 직간접적 연관을 맺었으며, 이는 후술할 1960~80년대 군부정권에서도 이들을 동원한 백색테러가 계속되는 주된 요인이 된다.

대한반공청년단의 발족식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이승만. 출처: 국가기록원

 

이후 '사회적 혼란을 일소하겠다'는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민심을 얻기 위해 이정재 등의 당대 유명 정치깡패들을 체포 및 처형하지만, 이들의 다수는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군부정권 하에서 더욱 제도적으로 변화한다. 박정희 정권은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내내 야당 탄압 및 노동운동 탄압에 이들을 동원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76년의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당시 신민당의 소수파였던 이철승은 김영삼으로부터 당의 헤게모니를 되찾기 위해 차지철 등 정권의 주요 인사와 협업하여 조직폭력배들을 동원해 당사에서 각목 난동을 벌였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의 각목 난동 사건.


백골단과 구사대의 시대

박정희 정권을 승계한 제5공화국의 전두환 정권과 군부 세력의 일소에 실패한 후 들어선 노태우 정권은 야권 세력 및 운동권들을 탄압하기 위해 과격 시위진압 및 백색테러 행위를 한층 더 제도화한다. 이승만 정권 이후 제5공화국에서 다시 부활한 '백골단'은 1980~90년대 당시 경찰기동대 소속의 시위진압 사복체포조로 활동했던 인원들의 통칭이다.

1990년대 백골단의 모습. 출처: 한국인터넷언론인협동조합

 

공식 제복이 아닌 흰색 하이바에 청자켓 혹은 티셔츠, 청바지 차림을 한 백골단은 대오를 맞추어 시위대와 대치하는 기존의 경찰중대를 보조하여 시위대 측 대오에 섞여들어가거나 개별 인원들을 타격하는 방식으로 폭력적 시위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85년 경 처음 창설된 이러한 사복체포조 인원들은 전두환 정권 시절 학생운동과 도심 가두시위 진압에 적극적으로 투입되었다. 제도적 민주화가 진척된 6월 항쟁 이후에도 이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노태우 정권과 뒤를 이은 김영삼 정권 시절까지도 대규모의 집회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민주화 이후 백골단이 가장 악명을 떨친 시기는 최후의 범국민적 대규모 투쟁으로 평가받는 1991년 5월 투쟁 국면이었다. 당시 군부정권을 승계한 노태우 정권에 맞선 투쟁 속, 명지대학교 학생이었던 강경대 열사가 시위 중 백골단의 집단폭행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강경대 열사는 명지대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학교에서의 시위 중 서울시경 4기동대 94중대 소속 백골단원 5명에게 쇠파이프로 잔혹하게 구타당해 사망했다. 이는 직후 이어진 연쇄 분신과 열사투쟁 정국의 기폭제가 되었다.

연세대학교에 걸린 강경대 열사의 초상화.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노태우 정부는 폭행치사를 저지른 경찰들을 해임하고 형식적인 사과를 내놓았지만, 이후로도 백골단의 만행은 1991년 투쟁 국면 내내 지속되었다. 당시 백골단원들이 강경대 열사 진상규명을 위해 단식투쟁을 진행하다 안기부의 고문치사로 사망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열사의 빈소에 진입하여 유족들을 폭행하고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는 사진[각주:5]은 현재도 백골단의 만행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으로 남아 있다.

한진중공업 고 박창수 열사의 장례식장에 난입하여 시신을 탈취하는 백골단원들. 출처: 안양지역도시기록연구소

 

백골단이 당시 경찰에 의한 제도적 백색테러를 상징하는 존재였다면, 789 노동자대투쟁 이후 재점화된 민주노조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측의 백색테러 수단으로는 구사대(求社隊)가 그 악명을 떨쳤다. 백골단이 특정한 조직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경찰기동대 소속의 폭력적 사복체포조를 통칭하는 이름이었듯이, '회사를 구하는 무리'라는 뜻의 구사대 역시 사측에 고용되어 무력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용역깡패 등의 통칭으로 통용되었다. 이들의 다수는 과거 1~4공화국 시기의 정치깡패들처럼 우익 성향 조직폭력배들이었고, 심지어 일부 회사는 합법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경찰의 물밑 협조를 받아 전투경찰 인원들을 구사대로 위장하여 배치하기도 했다.

 

백골단은 1990년대 중후반 이후 급진적 사회운동의 쇠퇴에 맞춰 점차 사라지고 이른바 '단셋' 등의 정복 경찰기동대에게 그 역할을 인계했다. 그러나 경찰기동대의 폭력적 시위진압은 그대로 이어졌고, 이는 2006년 대추리 투쟁, 2008년 용산참사, 2009년 쌍용자동차 투쟁 등에서 지속적으로 사상자가 발생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구사대는 현재까지도 파업 분쇄를 위해 사측이 동원하는 용역깡패나 파업파괴조 등으로 그 역할과 존재를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혐오 정치와 만난 21세기의 백색테러

21세기 이후 시위 문화의 변화 및 시민사회의 발전에 따라 과거와 같은 대규모의 백색테러는 거의 사라졌지만, 최근 반공주의를 조장하는 우파 정당의 지지자들과 개신교 극우 세력 등이 혐오 정서와 결합하여 새로운 백색테러의 주역으로 떠오르며 또 다른 사회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백색테러를 정당화하며 극우 폭력단체의 부활을 도모한 사례는 자칭 '백골단'이 처음이 아니다. 이런 류의 활동은 지난 박근혜 정권 당시에도 '서북청년단 재건위' 등의 이름으로 존재해 왔다.

서울광장에서 노란 리본을 제거하겠다며 난동을 부리는 서북청년단 재건위 회원. 출처: 민족문제연구소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서북청년단 재건위'라는 이름의 단체는 서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낸 구국의 서북청년단을 잇겠다"며 서북청년단의 재건을 선언했다. 당시 이들은 "세월호 유족들과 시민들이 달고 있는 노란 리본을 제거하겠다"는 등의 극우적 언사를 남발하며 많은 물의를 빚었다. 이들은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스스로 서북청년단 회원임을 밝힌 일련의 사람들이 작년인 2023년 열린 제주 4.3 75주년 추모제에도 난입하여 "공산주의자" "빨갱이" 등의 비난을 일삼으며 유족들을 위협하기도 했다.[각주:6] 이들은 세월호, 이태원 등의 사회적 참사와 4.3, 5.18 등으로 대표되는 독재정권의 학살이 '좌파들의 음모'임을 주장하며 주된 표적으로 삼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기존 반공주의와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 소수자 혐오 등의 사회문제들이 맞물린 형태의 새로운 백색테러가 또한 대두하고 있다. 지난 22대 총선 대구 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한 자유통일당(전 한국국민당 소속에서 당적 변경) 박진재 후보는 선거기간 중 스스로 대표를 맡고 있는 '자국민보호연대'라는 제노포비아 성향의 우익 시민단체를 동원해 외국인들을 불법적으로 체포·검문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협박하여 금품을 갈취하는 등의 활동으로 물의를 빚었다. 이들은 틱톡과 유튜브 등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공유하며 외국인 혐오 정서를 부추겼고[각주:7], 영상에서는 지역 경찰관들이 역으로 이들의 사적제재 행위를 제지하는 모습까지 확인할 수 있다.

사적제재 행위를 SNS에 업로드한 자국민보호연대의 박진재. 출처: 서울신문 (틱톡 캡처)

 

당연하게도 체류 자격이나 불법 여부를 떠나, 체포에 긴급성을 요하는 현행범이 아닌 이상 누군가를 임의로 구류하거나 체포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자국민보호연대와 박진재가 임의로 구류한 이주노동자들에게 "돈을 내면 고발하지 않겠다"고 협박한 것 역시 이들의 실제 활동 목적이 심지어 스스로 표방하는 '자국민 보호'조차 아님을 보여 준다.

 

이렇게 2020년대 이후 대두하는 새로운 극우 성향 폭력단체들의 공통점은 우익 유튜브 등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반페미니즘, 반성소수자 및 반이민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대다수는 본래 가지고 있던 반공주의적 세계관과 새롭게 대두한 혐오 정치를 결합시켜 '탄핵 집회를 중국인이 주도하고 있으므로 외국인들을 추방해야 한다' '좌파들이 기독교 세계관과 자유민주주의의 붕괴를 위해 성소수자 운동, 페미니즘 등을 획책하고 있다' 등의 음모론을 사실로 굳게 믿으며 퍼뜨리고 있다. 자경단을 자처하는 우익 폭력단체가 공개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 또한 여당의 국회의원이 이들의 기자회견에 협조했다는 것은 이러한 담론들이 더 이상 일부 극우의 음모론에 그치지 않고 보수 세력의 전면에 나서고 있음을 암시한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아직 이들을 몰상식한 구시대적 존재 정도로 치부하지만, 무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이들과 유사한 정세인식을 공유하며 내란을 획책했다는 것은 이러한 담론의 확산과 그 실천적 형태인 백색테러의 위험성을 무엇보다 경계해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한남동 관저에서 농성 중인 윤석열이 탄핵 반대 시위대에게 보냈다고 알려진 편지의 내용은 윤석열 스스로가 혐오에 기반한 음모론에 찬동함을 넘어 이미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윤석열이 자신의 집 앞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편지. 출처: MBC


민주주의에 정치깡패의 자리는 없다

1933년 독일, 나치의 집권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멸망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비합법적 정치깡패 조직이었던 돌격대(SA)와 친위대(SS)였다. 히틀러의 사병 조직으로 시작된 이들은 히틀러, 괴벨스 등 나치 지도부를 맹목적으로 수호하며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당원들 및 노동계급에게 무자비한 사적제재를 가했다. 윤석열을 수호하겠다며 국회에 선 '반공청년단'과 그 전위대를 자처하는 '백골단'이 단지 과거 한국의 경찰 조직뿐 아니라 나치 독일의 돌격대와 친위대를 연상케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백골단의 대표적 피해자인 강경대 열사의 유족들은 지난 1월 10일 국회 소통관에서 자칭 '백골단'의 기자회견을 주선한 국민의힘 김민전 의원의 제명을 촉구하고, 내란수괴 윤석열 체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강경대 열사의 아버지인 강민조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의장은 "또 다시 경대와 같은 희생이 많이 생기겠구나 생각했다"면서, "우리 가족이 목숨을 걸고 백골단을 막기 위해 윤석열을 체포할 때 함께하겠다" 밝혔다.

 

민중가요 <단결투쟁가>의 가사 속 "백골단 구사대 몰아쳐도, 꺾어 버리고 하나되어 나간다"에서 보여지듯,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적 진보는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한 백골단의 두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했던 모든 이들의 피로 만들어졌다. 다시 한 번 저항하는 이들의 피를 볼 것임을 암시하며 공공연하게 시민을 협박하는 극우 폭력단체의 준동을 방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며, 이들이 표상하고 또한 유포하는 반공주의와 혐오 정치를 윤석열과 함께 끌어내려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5년 오늘, 민주주의의 어디에도 정치깡패가 설 곳은 없다.

1월 1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강경대 열사의 유족. 출처: 뉴스1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이자 <도모> 편집장.

아마추어 디자이너 일도 가끔 한다.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만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


각주